[여의도포럼-김학수] 새해에는 느리게 살리라 기사의 사진
촛불과 태극기로 맞선 지난해는 국민에게 고통의 세월이었다. 작년만이 아니다. 2015년 박근혜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몰이와 2016년 여당 내 소위 친박 대 비박의 공천 대립으로 시민 갈등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각 가정의 식탁은 물론 일터, 동창회, 기도회, 심지어 재외교민회에서조차 촛불과 태극기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그런 양자 선택 사이의 다툼은 금년에 증폭될 가능성이 크다. 다가오는 6·13 지방선거가 더 세찬 기름을 붓지 않겠는가.

양자 중 택일 방식은 거의 모든 악의 근원이다. 세상을 오직 두 갈래로 나누려면 필연적으로 극단적인 단순화로 치달을 수밖에 없다. 지역, 인종, 종교, 성차별을 초래하는 모든 편견과 스테레오타입은 그런 단순화의 결과다. 우리네 대부분의 갈등과 분쟁이 강력한 지역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누구나 안다. 서양에서 유대인에 대한 인종주의는 악명 높다. 500년 전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유대교 문화를 멸살할 것을 개신교 신자들에게 촉구한 일이나 히틀러가 집권에 성공한 193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T S 엘리엇이 버지니아대학 강연에서 유대인 증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렇다면 그런 양자택일 행위는 어째서 일어나는가. 인간은 왜 여러 대안을 생각하기보다 굳이 양자만의 대안을 선호하는가. 신속하게 아니 겉으로 똑 부러지게 달라 보이는 것 중 하나를 결정하는 게 가장 편리하기 때문인가. 그러면 세상의 무엇이든 두 쪽으로 나누고 오직 그 둘만을 주목해야 하는가. 세 쪽, 네 쪽 등 다양한 아이디어와 가치, 인종, 출신지, 종교 등이 용인되고 존중되는 포용 사회는 불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어떻게?

생명 탄생과 진화는 어쩌면 불완전한 우주에서 효율적으로 살아남으려는 그 모든 것의 노력에서 파생된 결과인지 모른다. 그래서 생존의 제1 법칙은 가장 적은 에너지 소모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려는 원리다. 이른바 ‘최소 노력, 최대 성과 원리(least effort principle)’는 효율성의 극대화 추구를 가리킨다. 그런 효율성 추구는 인간의 모든 행위에도 작동된다. 순발력과 스피드가 존중되는 이유다. 두 개의 대안을 놓고 선택하는 것만큼 가장 단순한 의사결정 구조는 없다. 그러기에 양자택일은 우리의 사고 영역에서 가장 효율적인 행위다.

인간의 그런 효율적 행위는 결국 ‘잽싼’ 생각과 동작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모방, 기억, 수정, 의문, 상상, 창작 등 다양한 생각의 양태 중 어느 것이 가장 잽싸게 구현될 수 있는가. 그리고 주어진 신체 조건이 구사할 수 있는 동작의 양태 중 어느 것이 가장 날쌔게 작동 가능한가. 전자의 경우 남의 아이디어를 그대로 따오는 모방이나 과거의 경험을 재활용하는 기억이 가장 손쉽게 이용될 수 있는 생각의 양태이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입과 혀, 그리고 손과 발이 아닐까 싶다. 도처에서 사고가 획일적 이즘(ism)으로 뭉치고 극단론으로 갈라지며, 각 갈래의 추동에 의해 적대적 집단폭력이 발생하는 것 또한 오직 효율 추구의 생존 원리 때문이다. 잽싼 생각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판단하게 만들고, 그것이 이끄는 날쌘 동작은 상대를 향한 폭력(언어 포함)이 되기 쉽다.

이제 가장 비효율적인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인간 행위를 생각해볼 때다. 느리게 생각하고 동작하는 ‘느림보’의 행보 말이다. 그것은 게으름뱅이 행위가 아니다. 모방과 기억을 넘어, 이런저런 아이디어로 수정해보고, 그럴듯한 주장일수록 의심해보고, 모든 가능성의 미래를 상상해보고, 그리고 여태까지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작해보는 생각의 양태들은 필연적으로 느림보의 행보를 필요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런 느림보가 다듬질한 웅숭깊은 사고는 쉽게 폭력적 행동으로 옮겨질 수가 없다. 오히려 이해와 연민이 묻어난 배려의 동작으로 승화될 가능성이 높다.

참으로 느림보의 생각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꼭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는 게 아니다. 사리판단의 논리보다 세상의 복잡한 얽힘과 다양성을 뿜어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의심하고, 상상하고, 창작하는 것은 물론, 최소한 기존의 아이디어나 가치를 수정해보는 생각의 양태들을 건너뛰어서는 아니 된다. 특히 청소년 교육에서 그러하다. 그래야 우리가 갈구하는 혁신이 범람하고, 다양한 제3의 길이 열리고, 회색지대가 꽃무지개로 빛나는 사회로 가꿀 수 있다. 국민통합은 동질적 단결이 아니라 무지개 꽃피우기다. 새해에는 보다 느리게 살리라. 촛불과 태극기 외의 채색도 감미(感美)하면서.

김학수 DGIST 커뮤니케이션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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