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송세영] 영화 1987, 김성수 기사의 사진
1986년 6월 25일자 석간신문에 ‘익사 서울대생 자살 단정’이라는 제목의 짧은 기사가 실렸다. ‘부산 송도앞바다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서울대 지리학과 1년 김성수(18)군 변사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김군이 최근 갑자기 성적이 떨어져 고민해 왔다는 가족의 진술에 따라 자살로 단정, 수사를 마무리 짓기로 했다.’

김군의 시신은 나흘 전인 21일 오후 6시쯤 잠수부가 발견했다. 송도 매립지 방파제에서 10m 정도 떨어진, 수심이 17m인 바다였다. 허리에는 3개의 시멘트 덩이가 매달려 있었다. 그 무게 때문에 수면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바닥에서 1m 정도 높이에 떠 있었다. 서울 관악경찰서 대공과는 23일 오후 10시쯤 그의 신원을 확인했다. 부검은 보호자도 없이 실시됐다. 20일 오후 10시부터 4시간 사이에 사망했으며 사인은 익사라는 게 결론이었다. 담당 형사와 검사는 빨리 화장을 하라고 종용했다. 24일 사실상 반강제로 화장이 이뤄졌다.

그는 같은 달 18일 대학생 누나와 함께 살고 있던 서울 영등포의 자취방을 나간 뒤 종적이 사라졌다. 이날 오전 9시30분에서 10시 사이에 전라도 사투리로 서울대생을 찾는 전화를 받은 뒤 급히 나갔다는 게 마지막 목격담이다.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교회오빠였다. 교회 학생부 회장으로 사회를 볼 때는 재치 있는 말솜씨로 교인들을 웃음바다로 이끌었다. 태백 황지초등학교 졸업식에선 700명의 졸업생을 대표해 답사를 했는데 식장이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태백에서 강릉으로 이사를 결심했다. 경포중과 강릉고를 졸업한 그는 86년 서울대에 입학했다. 연극과 영화를 좋아해 본부동아리인 총연극회에 가입했다. 총연극회가 5월제 무대에 올린 작품에서 그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군사정권에 항거한 학생운동에도 참여했다. 실종 이틀 전인 16일에는 명동성당에서 리영희 교수의 ‘한반도와 핵’ 강의를 듣고 나오다 관악서로 붙잡혀갔다 훈방됐다. 두 번째 연행이었다.

유족과 친구들은 경찰 수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실종 당일은 기말고사 첫 시험이 예정된 날이었다. 성적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성적비관 자살’이라고 결론지은 건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와 같은 궤변이었다. 경찰은 실종 직전 의문의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도 않고 수사를 종결했다. 멀리 부산까지 가서 자살할 이유도 없었다. 부산에 아무런 연고가 없었고 유서도 남기지 않았다. 외상은 없었지만 정교한 타격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두피 아래 상처가 부검에서 발견됐다는 증언도 나왔다. 시신 발견 장소도 의심스러웠다. 민간인통제구역인 데다 3m 높이의 방파제로 막혀 있었다. 심야에 시멘트 덩이 3개를 매단 채 사건 현장에 접근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관악서가 신원을 확인하기 10시간 전 어머니의 직장으로 정보기관 요원이 전화를 걸어온 것도 의혹을 더했다.

2000년 발족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도 이런 점에 주목했다. ‘사인은 익사가 아닌 뇌 손상에 의한 가사상태의 질식사’라는 부검의사의 새로운 진술을 확보하는 등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 증거와 진술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영화 ‘1987’을 보면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그의 이름이 생각났다. 박종철이 쓰러졌을 때 외부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면, 검찰에 연락하지 않고 임의로 처리했다면 그의 시신도 바다나 호수에서 발견됐을지 모른다.

1987년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은 박종철 이한열만이 아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하고 진상마저 은폐된 이들이 많다. 두 차례 출범했던 의문사진상규명위는 2004년 6월 활동을 종료했다. 1기에서 30건, 2기에서 24건이 진상규명 불능으로 남았다. 20대 국회에 의문사 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다시 발의됐지만 통과 전망이 불투명하다. 더 늦기 전에 진상규명 활동이 재개될 수 있도록 국민들의 관심이 필요하다.

송세영 사회부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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