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유성열] 통념의 늪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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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온 세상이 붉은색으로 빠르게 물든다. 한국에서는 축구 월드컵 시즌을 제외하고 길거리 곳곳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가장 많을 때다. 굳이 옷 전체가 아니더라도 목도리, 장갑을 통해 최소한 붉은 포인트를 주려고 시도한다. 실내에서는 레드 계열의 장식 소품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도대체 왜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당연하다는 듯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붉은색을 찾게 되는 걸까. 일단 빨강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을 상징한다는 주장이 있다. 반면 고대 로마 기원설도 제기된다. 로마시대 연말이 되면 농업의 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가 열렸는데 이때 호랑가시나무로 만든 화환이 쓰였다. 호랑가시나무 열매가 빨간색이어서 자연스럽게 12월을 대표하는 색상이 됐다는 설이다.

그러나 그 어떤 설명보다도 코카콜라 마케팅설이 가장 그럴싸하다. 시원한 음료를 파는 코카콜라사가 겨울철 급격하게 떨어지는 매출을 극복해보고자 1930년대 산타클로스라고 이름 붙인 붉은 옷을 입은 할아버지 캐릭터를 내세워 대대적인 판촉에 나섰다는 것이다. 실존 인물 성 니콜라스 대주교를 모델로 한 산타클로스는 수백년 전에도 존재했던 캐릭터지만 현재와 같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분명히 코카콜라 광고였다. 산타클로스는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고 그가 입은 옷의 색상인 붉은색은 12월에 가장 잘 어울린다고 여겨지게 됐다.

크리스마스에 붉은색 옷을 찾아 입으면서 그 배경을 굳이 고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내가 왜 붉은 옷을 입는지 스스로 묻지 않는다. 당연히, 그냥 꺼내 입는다. 다행히도 이 때문에 딱히 누군가에게 해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냥 당연히 그렇다’는 생각이 피해를 줄 때도 있다. 지난해 가을 치과에서 치료를 받았다. 두 달 가까이 통원하며 신경치료, 잇몸치료 등을 진행했고 예상을 넘는 견적이 나왔다. 수년 전 들어둔 실손의료비 보험 생각이 나 보험사 담당자에게 문의했더니 “치과 치료는 실비보험 대상이 아닐 것”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보니 의견이 분분했다. ‘당연히 안 되는 것 아니냐. 안 그러면 치아보험에 왜 따로 가입하겠느냐’는 지적이 눈에 띄었다. 그러던 중 ‘치과 치료의 비급여 부분만 보장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2009년 8월부터 보험에 가입한 사람은 치과 치료라고 해도 급여 항목에서 환자가 부담한 부분에 대해선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당장 보험사 애플리케이션에서 약관을 내려받아 실비보험 부분을 찾아봤다. 치과 치료의 비급여 항목만 보장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이 사실이었다. 다시 보험사 직원에게 연락해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치과를 다녀온 뒤 자신에게 보험금을 청구한 고객이 아직까지 없어서 치과 치료는 전부 당연히 안 되는 걸로 알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치과 치료는 대부분 비급여 항목이어서 당연히 받게 되는 보험금이 거의 없을 것”이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내가 받은 치료는 급여 항목이 많았고, 청구 결과 적지 않은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당연히 그렇다’는 통념은 쉽게 신념이 되기도 한다. 거기까지는 괜찮지만 한 발 더 나아가 편견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진실을 보는 눈’을 가려버린다. 정치적 신념이 강해지면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지인들과 각 후보 및 정당에 대해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지인 한 명은 A 전 대통령을 혐오한다. A 전 대통령은 B라는 정책을 추진했고,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현재 지지하는 C후보가 B정책을 입안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C와 A는 대척점에 서 있는 정치적 앙숙이지만, C가 당연히 좋은 정책인 B를 추진했을 것이라는 편견이었다. 통념은 편하다. 그리고 대개는 옳다. 통념에 기대면 실패할 가능성이 적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기에 몸과 마음을 푹 담그고 있으면 참 따뜻하기는 하다.

하루하루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평범한 개인에게 ‘통념을 걷어차고 혁신의 길로 나아가라’는 요구는 다소 엉뚱할 수 있다. 때로는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따금, 통념의 늪에서 일어나 몸을 풀어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 반대로 생각하고 의심해보는 작업이다. 치과 치료 보험금처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득을 취할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삶의 아이디어와 거대한 희망이 그때부터 피어날지도 모른다.

유성열 산업부 기자 nukuva@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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