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칼럼] 여론과 부론, 그리고 공론 기사의 사진
우리 시대 경세가였던 위공 박세일 선생이 돌아가신 지 1년이 됐다. 그는 평생 국가 비전과 전략에 골몰했다. 또한 국정에 참여해 금융실명제 교육개혁 사법개혁 등 굵직한 개혁을 주도했다.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국정을 수행하는 데 여론과 부론(浮論), 공론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론은 그때그때 형성되는 국민 의사라는 점에서 중요하지만 집단적인 감정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부론은 내용이 붕 떠 있는 의견들이다. 당파적인 싸움에 이용되는 선정적인 정치적 주장이나 인기몰이를 위해 포장된 담론들에서 볼 수 있다. 공론은 깊이 있는 연구를 바탕으로 지혜를 짜내고 이를 중심으로 숙의를 거쳐 형성되는 의견이다. 신고리 원전 재개를 이끈 공론화 과정이 그 예다.

당연히 정책은 여론이나 부론보다 공론에 바탕을 둬야 한다. 관건은 ‘전문성’에 대한 존중이다. 현대 사회는 전문 시스템(professional systems)을 가장 기본적인 조직 원리로 삼고 있다. 그것이 바탕이 되기 때문에 이 고도의 복잡사회에서 우리는 서로 믿고 살 수 있고, 안정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각 전문 분야에서는 쉬지 않고 지식과 실천의 피드백이 일어나고, 그를 통해 개선과 혁신이 이뤄진다. 물론 이 전문 시스템 안에도 긍정적인 변화를 가로막는 폐단이 쌓일 수 있다. 이로 인해 기능이 약해지고 다른 시스템들에게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이를 감시하고 문제를 드러내는 기능을 하는 전문가들도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민단체의 역할이다. 시스템에 경고의 호루라기를 부는 기능을 맡는 것이다. 체계를 구동시키는 전문가와 호루라기를 부는 전문가의 역할은 구별돼야 한다. 정책을 결정할 때 어떤 전문가들이 더 중요할까. 물론 두 전문가군의 견해를 두루 경청해야 한다. 하지만 체계 안의 전문가들 의견이 과소 반영되고, 호루라기를 부는 전문가의 의견이 과대 반영된다면 어떻게 될까.

새해 들어 하루걸러 정책의 불안정성이 표출되고 있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정부 들어 호루라기를 부는 역할을 했던 전문가들의 의견에 기대어 정책을 결정하는 사례가 빈발했다. 원전 전문가들의 공론은 무시되고 시민단체 의견만 반영된 탈 원전 정책은 그 신호였다. 최저임금 인상은 결국 속도의 문제인데 역효과에 대한 시장 전문가들의 우려는 기우로 치부됐다. 그 결과 세금 3조원을 민간의 임금 보전에 쏟아붓는 전대미문의 정책과 시장의 아우성을 막을 75개의 대책이 땜질로 쏟아졌다. 부동산 정책은 노무현정부의 데자뷔가 되고 있다. 강남 집값만 오르고 지방은 떨어져 부동산 양극화가 재현될 조짐이다. 공급과 교육에 대한 대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강남만 좋은 일 시킬 뿐이라는 전문가들의 조언은 규제로만 해결하려는 아집에 눌려 빛을 보지 못한다.

암호화폐 대책은 이 정부의 실력이 들통난 사안이다. 정책 결정자 가운데 블록체인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으면 전문가들의 의견이라도 충분히 수렴해야 했다. 그러지 않은 채 설익은 거래소 폐지책을 내놓았다가 암호화폐의 주 투자자인 젊은 세대의 반발에 부딪쳤다. 여론이 들끓자 ‘앗 뜨거워라’ 후퇴했지만 신뢰는 손상됐다. 미세먼지 대책도 즉흥적이다. 정확한 원인에 대해 전문가들과 충분히 머리를 맞댄 이후에 대책이 나와야 하는데 실효성 자체가 의심스러운 2부제 강제 등 책상물림 규제책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다. 서울시장은 한술 더 떠 전문가뿐 아니라 시민들도 고개를 젓는 ‘공짜 대중교통 대책’을 들고 나왔다.

알아야 면장을 한다. 국정은 전문가들의 지식과 지혜에 바탕을 두고 이뤄져야 한다. 전문가들의 의견이 다르면 이를 골고루 듣고 균형 잡힌 판단을 하는 것이 위정자들의 임무다. 정치적 성향이 같은 사람들의 큰 목소리에 의해 당위를 앞세워 만든 정책은 현실에 부딪쳐 튕겨져 나올 공산이 크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관료들은 그 뒷수습하기에 정신이 없다.

고도의 전문 시스템들로 이뤄진 오늘의 국가와 사회는 연속적인 변화 속에서 불연속적인 변화를 만들어내지, 그 역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국정의 시간은 축적의 시간이다. 그 축적 속에 개혁이 녹아들어 가야 한다. 축적의 시간을 중시하지 않는 개혁은 탈이 나게 돼 있다. 개혁과 정책의 성공 여부는 도덕적 당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현실 적합성에 의해 결정된다. 그 적합성은 전문시스템에서 공인된 전문가들의 ‘생각의 힘’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이를 중심으로 공론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여론과 부론에 의존하는 정책은 전문 시스템을 교란하고 결국 민생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박형준(동아대 교수·전 국회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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