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송용원] 새로운 500년의 길목에서 기사의 사진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에 비춰진 대한민국의 자화상은 어땠을까. 금년 30-50클럽 가입을 눈앞에 둔 대한민국의 1인당 소득 순위는 올랐지만 삶의 만족도는 떨어졌다. 특히 ‘누군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있느냐’는 항목에서 대한민국은 최하위를 기록했다. 무슨 말인가. 대한민국은 선한 사마리아인 지수가 꼴찌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공동선의 기준으로 삼는 성경구절이 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 질문에 대한민국은 낙제점을 받았다. 우리는 이기적 개인주의라는 악성 미세먼지 공습에 속수무책이 된 지 오래다.

사실 개인주의 문화는 서구 시민사회의 소산이다. 종교와 전통과 신앙을 위층으로 올려 보내고 계몽주의가 아래층 광장을 차지한 프랑스혁명 이래 지난 300년 지구의 북반부는 상대주의 세계관과 개인주의가 팽창돼온 역사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한계도 먼저 드러났다. 물질의 소유는 증가했어도 인간다운 관계가 감소되는 반비례 현상이 심화된 까닭이다.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토크빌이 말한 “풍요로움에 들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상한 불안”이나 ‘인간의 얼굴을 한 세계화’에서 스티글리츠가 지적한 전례 없는 상호 이익과 상호 비난의 공존 현상이 그것이다.

소비사회에서 삶의 목표는 재화를 가능한 한 많이 차지하는 것이 되고, 인간과 관계는 언제든지 쓰고 나면 대체가능한 상품으로 전락하고 있기 때문일까. 인간 존재 자체가 왜소해지고 무의미해진 세상! 마시지 못한 자들만 목이 마른 사회가 아니라 많이 마신 자들도 바닷물을 마신 듯 목이 타들어 가는 세상!

개인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해 사회 공적영역에서 배제한 종교의 신념과 가치가 다시 사회 주변부에서 새로운 공적 가시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하버마스의 진단은 이와 무관치 않다. 사회가 구조의 손짓을 보내는 셈이다.

인류 보편 가치를 지향하는 기독교와 같은 고등 신앙이 사회의 주요 이슈를 풀어가는 바람직한 동기나 태도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고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분법적 정교분리라는 오래된 상의에 사적 신앙이라는 낡은 하의만 입고 고집스레 지내던 시절엔 예상하지 못했던 새날이 오고 있다. “친구여 어찌하여 새 예복을 입지 않는가”라는 예수님의 물음처럼, 사회 공공성에 헌신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복장으로 갈아입으라고 요청하는 후기 세속시대가 대한민국에 상륙 중이다.

유럽의 영국교회나 독일교회는 교회가 사회공익을 위한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일찍이 포착했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영국교회는 반세기 역사를 자랑하는 유럽 최대 기독교 축제 ‘그린벨트’ 주제를 ‘공동선(Common Good)’으로 정했다. 사람을 기능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보는 기독교적 바탕 위에 유럽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개인의 선과 사회의 선을 어떻게 조화시킬까 고민하는 자리로 삼았다. 독일교회는 수십만 난민을 독일사회로 맞아들이는 ‘환대(Hospitality)’의 길을 선택했다. 이른바 ‘Germany Decides!’ 이는 중세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전 세계로 흩어진 종교 난민들이 써 내려간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되살린 것이다. 독일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시의적절한 방식이었다.

반면 한국교회는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어떻게 맞이했던가. 어려움에 처한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도움받기 가장 힘든 사회가 되고 말았다는 이 땅의 탄식에 그리스도인들은 가슴을 치고 울어야 한다. 한 사람의 개인을 소중하게 여기는 한국교회로 거듭나라는 광야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사랑과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한다. 촛대가 움직이기 전에.

송용원 은혜와선물교회 담임목사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