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생명의 노래를 불러라 기사의 사진
호머의 ‘오디세이’는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의 방랑과 모험을 그린 작품이다.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을 향해 배를 띄우는 오디세우스에게 ‘사이렌’을 조심하라는 경고가 내린다. 사이렌은 아름다운 처녀 얼굴에 새의 몸을 하고 날아다니며 달콤한 노래로 선원들의 넋을 빼앗아 파멸시키는 요괴들이다. 민방위 훈련 때 울리는 사이렌도 이 이름에서 유래됐다. 너무도 대중적인 유명 커피숍의 로고도 이 사이렌의 얼굴이다. 하지만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은 사이렌의 노래에 빠져들어 하나씩 죽어갔다. 오디세우스마저 거의 죽음에 다다랐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다.

그런데 이 사이렌을 물리친 이가 있었다. 산천초목을 아름다운 노래로 매혹시켰다는 하프의 명인 오르페우스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사이렌을 이긴 방법이다. 오르페우스가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한다. 갑자기 어디선가 달콤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사이렌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그의 선원들은 넋이 나가 차례로 바다에 빠진다. 그때 오르페우스는 자기의 하프를 들고 배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러자 사이렌의 노래에 정신이 나가있던 선원들이 그의 노래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죽음으로 이끄는 달콤한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다. 노래에 힘입어 그들이 탄 배는 사이렌이 지배하는 죽음의 바다를 무사히 빠져나간다. 처음으로 싸움에서 진 사이렌은 그 자리에서 돌덩이로 변하고 만다.

우리의 인생도 바다의 항해에 비유할 수 있다. 삶의 바닷길에도 언제나 사이렌의 노래 같은 유혹이 존재한다. 오늘날의 사이렌은 더 이상 반인반조(半人半鳥)의 기괴한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특히 돈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원래 돈이란 경제적 물물교환을 간편하게 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해 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돈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늙지도 죽지도 않으며, 인간의 통제마저 벗어나 있다는 점에서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미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경고하셨다. 여기서 ‘재물’은 잘못된 번역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 ‘맘몬’은 단순히 재물이나 돈이 아니라 ‘돈의 신’이다. 신격화된 돈이다. 신처럼 군림하는 재물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참 신이신 하나님과 돈의 신인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현대인들의 삶은 도박판처럼 변하고 있다. 무언가를 땀 흘려 생산하기보다는 누군가가 잃었기 때문에 얻는 이익을 탐닉한다. 사회 모든 영역이 점점 투기판처럼 돼가고 있으며, 이런 경제를 가리켜 학자들은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오늘날 사이렌은 ‘돈의 신’ 맘몬의 모습으로 우리 인생의 항해길에 나타나 이렇게 노래한다. ‘써라, 더 많이 써라! 지구환경이 파괴되든, 네 이웃이 굶주려 죽든 너와는 상관없다. 소비하라, 더 많이 소비하라! 그것이 너의 사회적 지위를 빛나게 해 줄 것이다. 걸어라, 한판 크게 걸어라! 네가 행운의 주인공이 될지도 모른다.’ 참으로 달콤한 노래다. 어떻게 우리가 이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탈무드에 이런 말이 나온다. “희망의 등불을 계속 밝히고 있으면 암흑에서도 견딜 수 있다.” 절망과 싸우는 것보다 희망을 유지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질병과 싸울 때 중요한 것은 몸 밖의 세균을 죽이는 것만큼 내 안의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일이다. 사이렌의 죽음의 노래에서 벗어나려면 우리도 -오르페우스가 그랬던 것처럼- 사이렌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야 한다. 생명의 노래를 부르면 된다. 한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영혼의 그윽이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흘러’나오게 하면 된다. 찬송을 부르며 살자. 큰 소리로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부르며 살자.

장윤재 이화여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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