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세환] 블랙 박스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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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에 고민 떠넘기면 성폭력 근절 요원
대중 관심받는 지금, 근본적 변화 끌어내야


항상 궁금했다. 대기업의 고위 간부, 국회의원, 판검사 등 소위 사회 권력층이 도대체 왜 말 한마디 혹은 손짓 한 번 잘못해서 인생을 망치는지. ‘손녀 같고 딸 같아서’ 골프 캐디의 가슴을 만졌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전 국회의장의 전례를 떠올려보자. 나라면 무서워서, 평생 쌓아온 업적이 아까워서 기침 한 번도 조심할 것 같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성추행·성희롱 혐의로 패가망신한 뉴스가 쏟아지는데 왜 아직도 회식 자리에서 성적 농담을 던지고, 몸을 더듬는 손길이 사라지지 않는 건지. 다들 특별히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범죄인 줄 알고 저지르는 악질도 있을 터다. 높은 직급이나 지위를 무기 삼는 야비한 족속이다. 서울의 한 지구대에서 50대 경위가 후배 여경을 두 달간 괴롭혔는데 “너랑 같이 근무하면 흥분된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평소 일 잘하고, 성실하다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었다. 경찰청이 부랴부랴 전체 여경을 대상으로 피해사례 조사에 착수한 게 벌써 3년 전이다. 그간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모르고’ 하는 경우다. 기분 전환용으로, 긴장을 풀어준다는 명목이다. 그러니 대기업 대표가 회식 중에 고추를 베어 먹는 퍼포먼스를 하고, 금융사 CEO가 여직원 골프대회를 열어 새벽까지 술자리를 강권하는 것이다. 그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피해자를 위해 장난 좀 친 건데 정색하지 말라고 오히려 반문한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며 도망갈 구석도 있으니 후자도 충분히 야비하다.

그래서 서지현 검사의 폭로가 촉발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공감의 차원을 넘어 가시적 변화를 가져오길 바란다. ①아픔을 홀로 견디는 피해자에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위안과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주고 ②일반인에게 ‘이런 것도 성추행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자각이 되며 ③가해자에게 극한의 공포감을 심어주는 한편 ④결과적으로 성범죄 관련법과 제도를 강화했으면 좋겠다. 만약 별 효과 없이 SNS상의 들불로 끝난다면 ‘어떻게 해도 우리는 안 바뀐다’는 더 큰 절망을 안겨줄지도 모르겠다. ‘너와 함께하겠다(#WithYou)’는 위로가 물결쳐도 사회 통념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저 해프닝으로 끝날 게 분명하다.

지난해 일본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기자 지망생 이토 시오리는 2015년 3월 민영방송 TBS 워싱턴지국장 출신 언론인 야마구치 노리유키에게 취업 상담을 요청했다. 야마구치는 식사하자고 꼬드겼다. 그해 4월 둘은 한 꼬치집에서 만나 술을 마셨다. 갑자기 그녀는 기억을 잃었고, 다음날 새벽 한 호텔에서 정신을 차렸다. 야마구치에게 강간당하고 있었다고 회상했다.

택시기사와 호텔 벨보이의 증언 등 관련 증거가 모아진 끝에 야마구치는 2015년 8월 불구속 입건됐다. 그러나 2016년 7월 혐의 불충분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결국 이토는 지난해 5월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며 대대적인 기자회견을 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국정운영 내막을 담은 저서를 발간하는 등 권력과 가깝다고 알려진 야마구치에 대한 경찰 수사에서 정권의 압박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온 사회의 관심이 집중됐다. 여성들을 중심으로 제2의 이토가 나오는 걸 막자는 운동이 벌어졌다. 1년이 지났지만 야마구치는 처벌받지 않았다. 성범죄를 입에 올리는 걸 쉬쉬하는 일본사회도 여전하다. 이토는 포기하지 않았다. 야마구치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자신의 경험을 최근 책으로 써냈다. 제목은 ‘블랙박스’다. 성행위는 두 사람만이 아는 밀실에서 행해진 차원이라며 경찰과 검찰이 블랙박스라는 표현을 자주 쓴 것에 착안했다고 한다. 피해자는 끙끙 앓는데 가해자는 기억도 못하는 무책임한 현실과 무능한 수사기관, 금방 관심이 식는 여론과 세태를 꼬집는 말이다.

서 검사와 이토처럼 용기를 낼 환경도 처지도 안 되는 침묵의 피해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 당당히 맞서라는 주문은 사치일 수 있다. 당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가정해보자. 모든 게 막연하고, 불확실하다. 경찰에 신고하면 가해자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을지, 신고 후 피해자 보호는 가능한지. 딱히 증거가 없을 경우 상대방이 잡아떼면 어떻게 할지 따질 것이 너무 많다. 피해자에게 고민을 떠넘기는 사회에서 성범죄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대중의 관심이 쏟아지는 지금 바꿔야 한다. 항상 뒤편에 물러서 있는 여성가족부가 앞장서서 블랙박스 해체 작업을 시작해보자.

글=박세환 산업부 기자 foryou@kmib.co.kr,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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