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일수] 우리가 추구할 헌법의 기본가치 기사의 사진
자유민주주의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 인권의 핵심적 가치
헌법 개정 논란 와중에 은근슬쩍 이 조항을
훼손하려는 일부 세력의 시도 단호히 물리쳐야

최근 개헌 논의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가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논쟁의 발단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당 원내 대변인이 현행 헌법 제4조에 나오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는 평화통일 정책에서 ‘자유’를 삭제하고 그냥 ‘민주적 기본질서’로 바꾸기로 한 개헌안을 발표했다가 몇 시간 후 이를 번복한 것이다. 이미 여당 내 전문가 그룹에서 준비한 개헌안도 이 방향에 서 있다는 사실이 일찍부터 알려진 터라, 그것이 한 개인의 단순한 착오에 의한 해프닝 정도로 치부될 사안이 아니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오히려 당연해 보인다. 두말할 것 없이 통일 정책은 이 시대 우리 모두의 중요한 과제이다. 더구나 북한 정권의 일방적인 핵보유국 선언으로 초래된 사상 초유의 한반도 위기와 국제적인 초긴장 국면은 평창 동계올림픽 같은 평화의 대전을 앞두고서도 민족의 장래를 깊이 염려하는 생각을 가볍게 떨쳐 버릴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여기에서 민감한 문제는 그냥 민주주의가 아니라 바로 자유라는 점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동서 냉전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겪어왔다. 민족의 분단과 상처 깊은 한국전쟁을 통해 냉전구도가 어떻게 가시화되었는지를 우리는 몸소 체험을 했다. 1990년대 초에 이르러 동서 장벽은 구소련의 해체와 동구 공산권의 몰락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유일한 잔재가 이 한반도 우리의 분단 현실인 것이다. 그간 남북대화와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몇몇 괄목할 만한 공동성명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 같은 팽팽한 군사적 긴장의 순간이 끊이지 않고 돌발했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 긴장의 와중에서도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인도적인 대북지원을 포함한 화해의 노력들을 우리는 통일로 가는 긴 호흡에서 보아 긍정적으로 평가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간의 모든 막연한 기대와 희망들은 북한 핵무기 개발과 미사일 체계의 구축으로 부서져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낭만적인 환상에서 깨어나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해야 할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의 위력을 체험한 후 국제사회에서 강대국들이 내세우는 정의도 이 가공할 핵무기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종 실감하고 있다. 북쪽으로부터 오는 핵위협 앞에서 한반도 비핵화가 얼마나 공허한 정치적 수사인지를 새삼 절감하고 있는 것이다. 핵과학자들이 발표한 2018 지구 종말시계는 특히 북한 핵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현재 진행 중인 갈등으로 인해 종전보다 30초가 앞당겨진 자정 2분 전까지 기울었다고 한다. 한쪽의 핵위협을 바로 곁에 두고서 우리 헌법상 평화통일 정책조항이 또한 얼마나 낭만적인 프로그램인지는 두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에 입각한 평화통일의 방향은 여전히 함부로 손댈 수 없는 중요한 과제다. 우리 국가와 사회를 하나로 엮어가는 통합의 정신적 원동력일 뿐만 아니라 국민 각자의 다양한 이념적 가치관에도 불구하고 마치 태극기의 표상처럼 우리의 오른손을 포개어 각자의 마음을 한 방향으로 수렴하고 이끌어가는 소망스러운 목표점이 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색깔을 분사할 수 있는 스펙트럼 같기도 하고, 어느 정치학자의 말처럼 무엇이든지 담아낼 수 있는 큰 가방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추상성을 띤 민주주의를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 헌법의 기본 질서와 가치로 엮어내는 것이 바로 자유라는 무게가 실린 자유민주주의라는 이 말이다. 프랑스혁명과 미국 독립전쟁을 거치면서 더욱 의미가 깊어진 ‘자유, 평등, 박애’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탄생한 신생국가들의 헌법 속에 예외 없이 ‘자유, 정의, 참여’의 기본 가치로 그 생명력을 이어왔다. 이들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적 인권의 핵심적인 가치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헌법 개정을 앞두고 우리가 우려스러워하는 점은 헌법을 가지고 장난치려는 시민사회의 일부 세력의 암약이나 준동 같은 것이다. 결코 끼워 넣기 식으로 또는 구렁이 담 넘어가는 식으로 일부 조항의 근본규범성이나 도덕법칙성을 훼손하거나 비트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일반인들의 눈길이 잘 닿지 않는 헌법의 한 귀퉁이에서 사회의 기본적 가치질서를 뒤흔들 말 하나를 덧칠하거나 생략함으로써 특정 이익을 은근슬쩍 관철시키려는 간계를 우리는 깨어나 물리쳐야 한다. 헌법은 국민 생활의 오늘과 내일을 위한 기본이 되는 법이고 그 근간인 자유민주주의는 인류 보편성을 지닌 가치이기 때문이다.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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