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대통령의 탄원서 기사의 사진
1401년 조선 태종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이 있으면 북을 치도록 대궐 밖에 신문고를 설치했다. 송나라 태조가 등문고를 설치해 민의를 들었던 제도를 조선에도 도입하자는 안성학장 윤조 등의 상소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북을 함부로 치면 벌을 받았다. 하급관리나 종이 그의 상관이나 주인을 고발하거나 품관, 향리, 백성 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한 경우, 다른 사람을 매수·사주해 고발하게 하는 자는 벌을 받았다. 종사(宗社·종묘와 사직)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나 누명을 썼을 때 등에 한해 상소를 받았다. 그래서 실제는 자주 활용되지 않았다. 결국 연산군 시대에 폐지됐다가 1771년 영조 47년에 탕평책의 일환으로 부활했다.

조선시대 충신들은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민심을 전했다. 불의에 맞서는 신하들의 결기와 항변이 때로는 억울한 죽음을 막고 역사의 줄기를 곧게 세웠음은 과거 기록물들이 보여주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항소심 선고를 앞두고 지난달 중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선처해달라는 내용을 담은 탄원서를 법원에 냈다고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육필로 쓴 A4 용지 4장 분량의 탄원서에서 ‘이 부회장에게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그의 청탁을 들어준 사실이 없으며, 삼성이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를 지원한 사실도 알지 못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고 한다. 공모자로 의심받는 재계 총수를 위한 전직 대통령의 탄원서라니 뜬금없다. 억울한 사람의 사연을 헤아려 달라는 게 탄원서인줄 알았는데…. 이 부회장의 뇌물죄 혐의가 자신과도 얽혀 있어 형량을 줄이려는 심산인 듯하다. 자기 재판에는 안 나오고 법을 우롱하면서 탄원서를 통해 변명하는 걸 보니 구차하다.

2009년 11월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삼수에 나선 김진선 강원지사와 조양호 2018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사면과 복권을 건의하는 탄원서를 냈다. 경제단체와 체육계도 동참했다.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인 이 회장이 활동을 재개하는 게 꼭 필요하다는 읍소였다. 이 회장은 경영권을 이 부회장에게 편법 승계하려다 대법원에서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그해 12월 이명박 대통령은 이 회장을 ‘원포인트’ 특별사면했다. 탄원서 때문은 아니겠지만 부자의 운명이 묘하게 닮았다.

이명희 논설위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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