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전철] 나를 넘어서는 것 기사의 사진
“그 이후 나는 저물고 있었다. 행복을 탐낸다는 것이 죄악처럼 두려운 오월.” 시인 고정희의 시 화육제별사(化肉祭別詞) 한 토막이다. 역사의 아픔과 내면의 슬픔이 깊이 결탁된 시의 한 문장을 음미한다. 한 시대를 신앙의 눈으로 고민했던 시인은 우리에게 행복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생의 행복을 소망하는 것은 인간의 귀한 목표이자 가치다. 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목적을 행복으로 정의했다. 한편 어거스틴은 인간이 이 지상에서 온전한 행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만나는 모든 행복은 불완전한 행복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을 탐내는 것은 하나님 신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개인의 성공과 행복이 강렬한 시대정신으로 추구되는 이 시대에서 행복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지난시절 ‘통일’이 ‘대박’이라는 조어로 결합된 것이 낯설었다. 또한 ‘신학’이 ‘번영’과 만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았다. 아마 죽은 시인이 다시 살아 ‘통일대박’과 ‘번영신학’이라는 신개념을 들었다면 어떠한 이물감과 좌절감을 가졌을까. 실로 기독교의 본질이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욕망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 신앙인에게 주어지는 불행한 일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떠나버리는 사건이리라. 독일 목사이자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신학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시험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그것은 바로 신학자들의 신학 작업에 하나님이 떠나버리는 사건이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우리’가 아닌 ‘나’만을 위할 때 하나님은 그를 떠나신다는 것이다.

나의 신앙이 나만의 성공과 행복을 추구할 때, 이는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나의 신앙이 너의 행복을 향하지 않는다면 이는 참 신앙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신앙의 세계에 순수한 나만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성서의 하나님은 나만을 넘어선 우리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신학자 안병무는 죄를 공(公)의 사유화로 보았다. 오늘 우리는 나만을 위한 욕심과 너를 향한 기도 사이 어디에 서 있는 것일까. 우리는 나만의 성공과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진정 행복한가. 아니면 참으로 불행한가.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은 성공과 행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마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표적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점점 더 놓치게 될 것이다. 성공이란, 행복과 마찬가지로 추구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훌륭한 어떤 일에 전념하다가 뜻밖에 얻어지는 부수적인 결과나 또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완전히 내어줌으로써 얻어지는 부산물 같은 것일 뿐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는 너의 행복과 구원을 향해 나의 모든 것을 던진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한다. 예수는 다른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내어주었다. 나를 넘어 너를 향해 모든 것을 던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동경과 따름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다. 신앙은 나를 넘어서는 결단이다. 나를 넘어서는 결단은 불행이 아니라 행복과 닿아 있는 것 같다. 나를 넘어선다는 것은 매우 영적이며 동시에 매우 사회적이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나를 넘어 너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 너의 행복으로 인해 내가 행복해지는 것.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마음으로 신앙과 신학의 길을 걷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기에 생명의 기쁨과 신앙의 행복이 다가오는 것. 깊은 차원의 평화와 사랑의 경험이 일상에 드러나는 것. 나를 넘어서는 것은 신앙의 출발이자 매우 고귀한 열매다. 이는 주님이 가르쳐주신 소중한 행복의 유산이다. 우리 시대는 나의 성공과 행복이 어느덧 지상 최고의 미덕이 되어버린 무한경쟁의 한복판이다. 하여 사랑이 없는 매우 쓸쓸한 거리다. 이제 나를 넘어서는 삶으로 이 시대의 그림자를 넘어서자.

전철 한신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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