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참 곱소” 기사의 사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해 내려온 평양 사람들은 일사불란하다. 서울의 풍경에 놀랄 만도 한데 표정 변화가 없다. 그것이 짠하기도 하다. ‘그놈의 우리 민족’만 아니라면 꽉 막힌 저 전근대성을 마음 편하게 배타적으로 대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역사학자 박지향 교수의 한 저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많은 민족은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비참한 민족이라는 자기 이미지에서 일종의 위안을 얻고 있다. 자기 민족의 외형적 허약함을 보상하고자 내적, 정신적 순수함과 고결함으로 무장하고 가장 고통 받는 자가 결국 승리한다는 신화에 집착한다.’

우리도 그랬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인식’, 즉 근대를 경험하지 못하고 타자의 손에 분단됐던 남북한은 ‘고통의 신화’를 의지해 살았다. 남북한 독재권력은 이 고통의 신화를 증폭시켜 왔다.

1894년 5월 10일 미국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이 서울을 출발해 제물포를 거쳐 평양에 도착했다. 6개월 된 아들 셔우드를 안고서였다. 로제타는 이태 전 의료선교사 윌리엄 제임스 홀과 결혼한 새댁이었다. 이들은 본국 선교부 발령에 따라 서울과 평양에서 각각 근무했다.

앞서 4월 그녀가 스크랜턴 선교사 부부에게 평양행의 안전성을 묻기 위해 그들 집을 찾았을 때 영국 여성 탐험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그 집에 묵으며 조선 여행을 하고 있었다. 비숍은 ‘무위도식하는 양반’과 ‘흰 빨래 하는 노예’라는 말로 봉건 조선을 규정했다.

아기를 안은 백인 여성의 등장에 평양은 뒤집어졌다. 남녀 구경꾼들 때문에 그들은 단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병원과 사택을 둘러싼 구경꾼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자 궁여지책으로 여성에 한해 10명 단위로 5분씩 보여주겠다 약속하고 해산시켰다. 이튿날 1500여명이 몰려들었다. 질서가 무너졌다. 별 수 없이 모자가 마당으로 나왔다.

로제타는 “병든 여인과 아이들을 치료하기 위해 왔다”고 호소했으나 대중은 그저 진기한 구경거리에 정신이 나가 있었다. 로제타는 서울 보구여관(이화의료원 전신)에서 자신의 피부를 이식해 조선 소녀의 화상을 치료해주는 등의 의술을 행했다. 괴사된 팔을 잘라야 한다고 해도 소녀의 아버지가 신체발부수지부모라며 결국 애를 죽게 만드는 전근대국가. 20명이 넘는 남자 감방에 과부 죄수를 집어넣어 성폭행하게끔 놔두는 조선의 현실을 쓴 그녀의 일기는 차마 읽기 어렵다.

몇날 며칠 구경꾼들은 모자에게 “참 곱소(lovely)”를 연발했다. 윌리엄이 사고 날까 두려워 관아에 ‘기수’를 요청하고서야 진정됐다. 윌리엄은 그해 11월 발진티푸스로 순직했다. 그 아들 셔우드는 의사가 되어 어머니와 함께 평생 조선의 병자를 위해 살았다.

그때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심상치 않았다. 조선 약탈을 위한 일·중·러의 전쟁이 임박했고 외세와 탐관오리에게 저항하는 동학농민전쟁이 시작되던 해였다. 로제타의 평양 방문 기간 중 평양감사는 선교사를 돕는 조선인을 다 잡아들이고 고문했다. 또 돈을 요구했다. 로제타가 구경꾼에게 “포졸들이 드나드는데 무섭지 않냐”고 했으나 “곱소”만 연발했다.

로제타가 한 달여간 병자를 돌보고 제물포항에 도착했을 때 봉기군 진압을 위한 13척 군함이 정박해 있었다. 로제타는 “가여운 한국, 충돌로 나라가 소멸될까 걱정된다”고 일기에 적었다.

윌리엄은 이때 선교보고를 통해 ‘청과 일본이 조선을 전장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다’며 ‘세상 나라들이 더는 전쟁을 하지 않는 복된 날이 오길 기대한다’고 썼다.

그해 평양 관리와 구경꾼들은 누구도 평양 일대가 청일전쟁으로 불바다가 될 줄 몰랐다. 그들 구경꾼들은 강간과 약탈 대상이 됐다. 8년 후 또 그 일대에서 러일전쟁이 터졌다.

오늘 우리의 시선은 “참 곱소”에 꽂혀 있다. 북한 여성 응원단 이동 중 화장실까지 따라가는 ‘시선’은 대체 뭔가. 새로운 시대에 대한 성찰 부족의 북한과, 부와 쾌락에 몰두하는 남한은 여전히 신화를 쫓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국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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