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감성노트] 인간 알레르기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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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치료약은 내복이나 패딩 점퍼와 비슷하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한파를 견디기 위해 내의에 두툼한 외투까지 껴입는 것처럼, 계속되는 스트레스에 가슴이 찢어질 때는 항우울제가 마음을 보호해줄 수 있다. 그렇다고 현실의 칼바람에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법이 꼭 약이어야만 하는 건 아니다. 운동도 좋고, 취미생활도 좋다. 타인을 돕고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헌신할 수 있다면 더 좋다. 다른 사람에게 온기를 나눠줄수록 우리 마음은 더 따뜻해지는 법이니까.

아이가 놀라거나 두려워할 때 엄마가 꼭 껴안아주면 금방 안정되는 것처럼, 거친 세상에서 정신건강을 지키려면 어른에게도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정서적으로 연결되어 친밀감을 경험하면 뇌에서는 옥시토신 (oxytocin)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은 안전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고 스트레스 호르몬이 신체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막아준다.

얼마 전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다가 주인공이 “나는 인간 알레르기 환자”라고 말하는 장면을 봤다. 꽃가루나 복숭아를 질색하는 사람은 자주 봤는데, 사람이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원인이라고 하니 놀랍기도 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인간 알레르기가 그리 특이한 현상 같지는 않았다. 내가 상담했던 사람 중에도 인간 알레르기 때문에 고생하는 이가 꽤 많았다. 상사의 폭언으로 트라우마를 받았지만 어디다 하소연도 못하고 가슴에 묻고 지냈던 직장인은 상사와 비슷한 사람만 봐도 부들부들 떨었다. 회사에서 ‘일을 잘해야겠다’는 마음보다 ‘어떻게 하면 상사를 피할 수 있을까’만 신경 쓰게 되었다고 했다. 오래 사귄 애인의 변심에 충격 받고 “두 번 다시 연애하지 않겠노라” 선언한 이도 있었고, 믿었던 가족이 모함해서 고초를 치러야만 했던 이는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두 인간 알레르기 증세였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해”라고 외치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 아닐까. 사람이 곁에 있어 위안이 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사람 때문에 상처 받고 싶지 않다면 혼자만의 세상으로 도망치려는 것이 혼밥과 혼술 문화로 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신경 끄기의 기술’이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나 ‘약간의 거리 두기’라는 책이 주목받는 것도 인간 알레르기로 고생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아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알레르기는 회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다. 항원이 하나도 없는 곳에서 살 수는 없다. 봄철이면 사방에 흩날리는 꽃가루를 완전히 피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 복숭아야 안 먹으면 그만이지만, 사람 없이 혼자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 사람마다 원하는 것이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고, 살아가는 방식도 다 다른데 현실에서 어떻게 갈등이 없을 수 있겠는가.

신체적인 알레르기를 치료할 때처럼 인간 알레르기도 원인에 조금씩 노출시키는 것이 치료다. 그러다 보면 탈감작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항원에 대한 과민 반응은 점차 약해진다.

인간 알레르기도 마찬가지다. 당장은 괴로워도 사람과의 접촉을 늘려나가야 한다. 지나치게 밀착되지 않는 관계를 맺어나가면 좋다. 가벼운 농담을 하며 커피 한 잔 마실 수 있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면 된다. 무릇 인간관계란 진지하고 깊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버리는 게 좋다. 좋은 사람 만나 친해질 수 있겠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깊은 관계를 맺기 어려운 사람도 이 세상에 더 많다는 걸 잊지 않아야 한다.

인간 알레르기 증상이 있다면 무엇보다 자기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람의 마음속에서는 강한 인정 욕구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인정받지 못하면 자기는 가치 없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신념을 뿌리 깊게 가진 경우가 많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알레르기를 만들기도 하지만, 인정에 대한 과도한 욕구가 사람을 회피하게 만들기도 하니까. 이것이 ‘완전히 인정받지 못할 바에는 아예 사람을 피하는 게 낫다’라는 생각으로 뻗어나간다.

만약에 실제로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을 바꿔보자.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나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으며,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라고 말이다.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삽화=공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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