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③ 호남 선교 문 연 7인 선교사

이국땅에 ‘복음의 집’ 세우고 ‘교회의 성’을 지킨 7인

[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③ 호남 선교 문 연 7인 선교사 기사의 사진
미국 기업인 조지 왓츠의 후원으로 건립된 전남 순천 매산중학교 매산관. 아래 사진은 매산중 바로 아래 위치한 순천기독교진료소 전경. 1925년 건립 당시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순천=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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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동부지역 선교역사는 전남 순천 북쪽에 위치한 매산언덕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0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이 이곳에 매산학교, 매산여학교와 기숙사, 알렉산더병원, 순천읍교회(현 순천중앙교회), 선교사 숙소, 발전기실 등 24개 건물을 세웠다. 선교 베이스캠프였던 것이다.

호남 동부지역 선교역사 한눈에

호남 선교역사는 순천시기독교역사박물관에 잘 보존돼 있다. 이곳은 순천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2012년 11월 개관한 공립 박물관이다. 지하 1층, 지상 2층에 650점의 자료가 있다. 호남 선교역사는 1892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7명이 내한하며 시작됐다. 미국 북장로교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91년 안식년을 맞아 미국 테네시주 내슈빌에서 열린 미국신학교 연차대회 등에 참석했다. 그는 강단에서 조선의 실정과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에 감동한 신학교 졸업반 학생 테이트 레이놀즈 전킨 등이 미국 남장로교 외지선교담당 실행위원회에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실행위는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로 선교 계획이 없다’며 거절했다.

당시 34세였던 윌리엄 레이놀즈와 36세 윌리엄 전킨은 낙심치 않고 교단 지도부를 설득했다. 교단은 ‘선교헌금이 부족해 조선 선교를 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이들은 선교잡지 ‘더 미셔너리(The Missionary)’에 은자의 나라인 조선 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게재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헌금이 들어오고 후원자가 나타났다. 뉴욕에서 타자기 회사를 운영하던 언더우드의 형 존 언더우드 등이 3000달러를 헌금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장신대 총신대 신대원 졸업반 학생들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하고 보건·의료 상황이 좋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선교를 떠나겠다며 선교비를 모으고 교단을 설득한 셈이다.

조선 선교사로 파송된 7명은 레이놀즈와 그의 부인 페시 볼링, 전킨과 그의 부인 메리 레이번, 루이스 테이트와 여동생 메티 테이트, 그리고 미혼의 여성 선교사인 리니 데이비스였다. 이렇게 최초로 조선에 도착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를 ‘7인의 선발대’라고 부른다.

1913년 시작된 순천선교, 학교 병원에 주력

레이놀즈는 1894년 3∼5월 호남지방 선교답사 여행을 하고 선교 거점지역으로 군산 전주 목포 순천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 보고했다. 본격적인 순천선교는 1904년 전남 동부지역을 선교구역으로 배정받은 클레멘트 오웬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다. 오웬은 순천에 여러 교회를 설립했으나 선교활동 중 급성폐렴으로 1909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오웬에 이어 존 페어맨 프레스턴과 로버트 코이트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당시 100여개 교회에서 6000여명이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1913년 순천선교부가 개설됐다. 매산언덕은 돌이 많고 공공묘지로 사용되던 척박한 땅이었다. 하지만 저렴한 비용으로 넓은 대지를 확보할 수 있고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4만㎡ 부지를 구입하는 데 약 2000달러가 들어갔다. 이를 당시 조선 엽전으로 환전해 옮기는 데 당나귀 3마리가 필요했다고 한다.

박물관에서 나와 매산길을 따라 걸으니 매산여고와 매산중이 나왔다. 매산여고 입구 학교설립기념비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시 127:1)’는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100여년 전 선교사를 통해 ‘복음의 집’을 세우시고 ‘교회의 성’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묵상했다.

선교사 13명을 매년 후원한 기업인 왓츠

400m쯤 내려가니 순천중앙교회 옆에 조지 왓츠 기념관이 눈에 들어왔다. 왓츠는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럼장로교회에 출석하던 장로다. 그는 1911년 부족한 선교부 건축비 모금을 위해 미국 순회강연을 하던 프레스턴을 만났다. 프레스턴의 설교에 감동한 기업가 왓츠는 13명의 선교사에게 매년 1만3000달러 후원을 약속했다. 왓츠가 1920년 여름 순천을 방문한 일이 미국 남장로교 보고서에 이렇게 기록돼 있다.

“조지 왓츠가 평소 큰 관심을 가졌던 한국의 선교지를 방문했다. 미션스쿨에서 성경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하는 것에 한국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여 일본 정부는 일부 미션 학교들을 6년 전 폐쇄했다. 선교사들은 왓츠에게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방문해 대화로 해결해 주기를 요구했다. 왓츠가 그렇게 함으로써 1921년 3월 학교는 다시 개교하여 성경을 가르칠 수 있게 됐다. 한국에 있는 남장로교회 소속 학교 중 유일하게 허락을 받은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서울 대광고 사태’ 이후 종교의 자유, 종교편향을 이유로 미션스쿨에서조차 성경교육을 똑바로 진행 못하는 현실이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순천선교부는 1925년 그를 기념하며 왓츠 기념관을 세웠다. 이 건물이 매산학교의 전신이다. 지금까지도 거의 완벽하게 건립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지방문화재 제127호로 등록됐다.

조건 없이 헌신하고 이국땅에서 스러져

선교사 7명 중 레이놀즈는 45년, 테이트는 33년간 목사와 신학교 교수, 성서번역가로 조선 선교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페시 볼링도 45년, 메리 테이트도 44년간 헌신했다.

반면 군산 구암교회와 개복교회를 개척한 전킨은 전주 서문밖교회에서 선교와 교육을 위해 활동하던 중 과로로 1908년 43세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아내 레이번은 한국 선교 중 세 아들과 남편을 잃고 1908년 귀국했다. 34세에 조선 땅을 밟은 여선교사 데이비스는 군산에서 어린이와 여성을 섬겼던 여장부였다. 하지만 환자를 돌보다 열병에 걸려 45세에 소천했다. 결혼한 지 6년 만의 일이다.

19세기 조선은 콜레라 천연두 말라리아 결핵 등이 만연했다. 콜레라가 기승을 부릴 땐 서울에서만 하루에 300여명이 사망할 정도였다. 선교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도 조선 민중과 똑같이 각종 풍토병과 수인성 질병으로 고통을 겪었다. 이국땅에서 아낌없이 복음을 전하고 쓰러져간 그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은 선교대국이 될 수 있었다.

순천기독교역사박물관 소개 책자 마지막에 이런 문구가 나온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나는, 우리 교회는, 한국교회는 이 문구 앞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을까. 다음 목적지를 향해 걷는데 ‘7인의 선발대’가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순천=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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