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풍향계-권오현] 수능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기사의 사진
대학입시 역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들자면 1994학년도에 시작된 대학수학능력시험의 도입이라 말하고 싶다. 이전의 학력고사가 모든 과목을 대상으로 단편적 지식을 측정해 교육을 암기 위주로 이끈다는 비난을 받은 반면에, 수능은 시험의 성격이나 내용 면에서 기존과는 파격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임으로써 큰 기대를 모았다.

교과별 학력이 아니라 대학 수학 적성을 평가하려 한 점, 과목을 최소화하고 탈교과적 출제를 지향한 점, 고차적인 사고력 측정이 가능하도록 다양한 원리들을 결합한 내용을 문항에 담으려 한 점, 책을 많이 읽은 학생이 유리하다는 전제 속에 독서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점이 특히 감동스러웠다. 실제로 1993년 8월 첫 수능이 모습을 드러내자 언론은 이런 점들을 들며 앞다퉈 찬사를 보냈다.

이처럼 애초의 수능시험은 점수만으로 줄을 세워 학생들을 선발하는 시험이 아니라, 대학에서 공부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종합적이며 심층적으로 판단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고교 내신과 대학별 고사를 연결함으로써 학교 교육의 바람직한 방향과 대학 수학의 높은 준비도를 함께 추구한 뛰어난 교육적 DNA를 지닌 전형 요소가 수능시험이었다.

그랬던 수능이 오늘날 ‘좋은 일해주고 욕먹는 시험’이 된 원인은 무엇인가. 무엇보다도 도입 취지는 잊은 채 여론에 맞춰 그때그때 무분별하게 제도를 바꿈으로써 원래 수능시험의 순도를 떨어뜨린 데 있다고 본다. 수능과 더불어 부활한 본고사가 입시 비리와 사교육의 회오리 속에 폐지되고 내신을 믿지 못한 대학들이 반영 비율을 최소화하자, 사실상 유일한 전형자료가 된 수능시험에 엄청난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출제과목이 아니면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문제 제기가 일면서 과목 수가 늘어나고, 이의 제기가 없는 시험이 되기 위해 문항들은 차츰 정형화돼 갔다. 대학 수학능력 측정을 표방했던 시험이 다시 교과중심 학력시험이 된 것이다. 그러자 감동을 줬던 교육적 호소는 실종되고 당국도 언론도 오로지 출제 오류와 난이도에만 관심을 갖는 이상한 풍토가 나타났다. ‘교육의 힘’을 추구한 수능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오늘날 수능 체제 개편을 다시 논의한다. 필자는 이번 수능체제 개편은 초기 수능시험 도입 때의 취지를 잘 살려야 한다고 본다. 객관식으로 평가한 점수로 수험생을 서열화하고 배치표에 맞춰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도록 하는 방식은 수능시험의 초심과 거리가 멀다. 수험생의 당일 상태나 속도 시험에의 적응 여부에 따라 최소 10점 이상 오차 범위가 나타나는데도 소소한 점수 차이로 당락을 정하는 선발 형태는 입시 공학적 선 긋기일 뿐 교육적 공정성이라 말하기 어렵다. 물론 관리체계의 엄정함이나 객관식 틀 내에서도 최대한 사고력을 평가하는 문항의 질적 차원에서 보면 수능시험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객관식 수능 체제는 학생들에게 종합적 판단력과 다양한 역량을 키워주려 하는 학교 수업과 유리돼 문제풀이만을 부추기는 한계를 지닌다. 수능시험 점수를 정시에 유일한 전형자료로 계속 활용하려면 논·서술형 도입과 같이 평가 방법을 최대한 다양화해 수능시험 문항과 학교 교육의 일체화를 먼저 이뤄야 한다.

이제는 수능 제도에 어떻게 교육적 힘을 강화시켜줄 건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출 때다. 성적으로 줄 세우기보다는 대학입학 적성시험의 성격을 확대하고, 다양한 전형요소들과 결합해 종합적 평가에 유익한 기준을 제공하는 ‘통 큰 시험’이 되면 좋겠다.

이런 점에서 대학입시의 촘촘한 선발은 학교 교육 기반 전형에 맡겨두고 수능 체제는 큰 기준으로 활용하는 형태가 그나마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수능시험을 원래 취지대로 돌려놓아 점수와 요령을 앞세운 준비 경쟁이 아니라, 학생의 소질과 잠재력을 강조하는 교육 경쟁의 바탕이 되도록 해야 한다.

권오현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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