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김정은 사전에는 ‘개과천선’ 없다 기사의 사진
핵·경제 병진 노선 중 핵은 거의 완성 단계

느닷없이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는 건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남측 지원을 받으려는 속셈일 것

북한 김정은은 2011년 최고 권력을 장악했으나 아직까지 국제외교 무대에 데뷔하지 못했다. ‘유일한 혈맹’이라 일컫는 중국조차 방문하지 못했다. 그런 그가 평창 동계올림픽 외교무대의 주인공 자리를 꿰찼다. 우리나라를 직접 방문하지 않았지만 대리인인 동생 김여정의 깜짝 등장과 느닷없는 남북 정상회담 제안, 선수단 동시 입장, 예술단 및 응원단 방문으로 단숨에 국제사회의 눈길을 휘어잡았다.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은 평화애호국’이라는 점을 은연중에 부각시킴으로써 ‘핵무기를 가진 최악의 인권유린국가’라는 실상을 조금이나마 희석시키는 데 성공한 셈이다.

그의 외교술은 아버지 김정일과 비슷하다. 김정일은 국제사회를 겨냥해 온갖 도발을 자행하며 긴장 수위를 한껏 높이다 대북 제재가 강화되면 한반도 주변 국가들과 정상회담까지 열며 유화 제스처를 보내면서 활로를 모색하곤 했다. 2000년 6월과 2007년 10월에 열린 남북 정상회담도 마찬가지였다. 김정은의 경우 지난해 말까지 미국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면서 미사일·핵 도발 수위를 높여갔다.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맞서 한·미 양국과 유엔은 대북 제재를 계속 강화했다. 그리고 올 초부터 김정은은 180도 태도를 바꿔 대대적인 평화 선전전에 나섰다.

동계올림픽 이후에도 김정은의 평화 공세는 지속될 것이다. ‘내가 통 크게 제안한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를 꾀하려면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필요하다’면서 문재인정부에 청구서를 잇달아 내밀 가능성이 있다. 어렵사리 복원된 남북 대화를 계속 발전시켜 나가기를 열망하는 문재인정부의 속내를 이미 간파한 상태여서 의외의 것을 요구할 소지도 없지 않다.

이렇듯 김정은은 미리 짜놓은 ‘우리 민족끼리’라는 남북관계 프레임을 수용하라며 남측을 때론 압박하고 때론 달랠 전망이다. 물론 그 프레임에는 핵 문제가 제외돼 있다. 우리나라와는 핵 문제를 논의하지 않겠다는 게 지금까지의 김정은 입장이다. 그러나 절대불변의 원칙은 아닐 것이다. 북·미 대화가 진전되고, 우리 정부가 비핵화 방안이 남북 정상회담 테이블에 올려져야 한다는 점을 꾸준히 설득한다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김정은 역시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원하고 있는 상태여서 더욱 그렇다. 김정은이 당분간 핵과 미사일 도발을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덜컥 밝힐 소지도 있다.

그러나 핵심은 김정은이 궁극적으로 핵무기를 포기하겠느냐는 점이다. 현재로선 그 가능성은 제로라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 핵을 놓는 순간 3대 세습 왕국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너무 크고, 핵을 갖고 있어야 체제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정부의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 있을 듯하다. 한반도 비핵화를 이뤄내야 하는데, 북·미 대화를 한다고 해도 김정은의 마음을 돌릴 방안을 마련하기가 매우 힘든 게 현실인 탓이다.

동시에 핵 포기 의사가 없으면서 갑자기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도 따져봐야 할 대목이다. 무엇보다 체제 유지를 위한 경제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게 아닐까 싶다. 김정은이 줄곧 천명해 온 게 핵·경제 병진 노선이다. 두 가지 중 핵은 거의 완성단계에 와 있다. 반면 경제는 여전히 낙후돼 있다. 북한 주민들의 민생고가 지속되면 내부 동요가 확산되고, ‘경애하는 최고영도자’ 이미지도 훼손될 수 있다. 그런데 독자 능력으론 경제난 해결이 불가능하다. 주변에 손 벌릴 나라도 없다. 지원을 요청하기엔 남측이 안성맞춤인 상황인 것이다.

경제적 지원을 명분으로 남북대화가 활발히 진행되면 비핵화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건 오판이다. 북한이 파놓은 깊은 수렁에 점점 빠져 우리나라가 허우적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김정은의 말은 순수하게 받아들여선 안 된다. 지난해 말까지 그가 우리나라와 국제사회를 겨냥해 퍼부은 언행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반성과 속죄의 말 한마디 없이 한반도 평화 전도사인 양 나대는 이면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문재인정부가 황송하다는 듯 받들어 모시려는 모습은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 거듭 강조하지만, ‘핵을 가진 평화’는 거짓이다. ‘선(先) 경제지원, 후(後) 비핵화’는 김정은이 바라는 바이다. 경협과 남북관계 개선 조치부터 시작하고, 비핵화를 장기과제로 넘기자고 요구할 공산이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 말려들지 말아야 한다. 김정은 사전엔 ‘개과천선’이라는 단어는 없다.

김진홍 논설실장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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