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역사에 자취를 남기려다간… 기사의 사진
역사와 대화해보라는 북한의 달콤한 권유 듣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냉철함으로 정상회담 추진해야
남남갈등 차단 위해 대북특사에 비서실장·국정원장 제외…
청와대 레드팀 운영으로 대북정책 약점 보완


“대통령께서 통일의 새 장을 여는 주역이 되셔서 후세에 길이 남을 자취를 세우시길 바란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 특사인 김여정 노동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이 지난 10일 청와대 오찬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건넨 말이다. 이런 말도 했다. “(올해가) 한 달 하고도 조금 지났는데 과거 몇 년에 비해 북남 관계가 빨리 진행되지 않았나. 북남 수뇌부의 의지가 있다면 분단 세월이 아쉽고 아깝지만 빨리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도 거들었다. “동포의 정을 느낀다. 올림픽 개회식 때 북남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역시 한 핏줄이구나 하는 기쁨을 느꼈다.”

평창올림픽을 축하하러 왔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덕담이었을 게다. 그런데 노파심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겉으로는 대화하며 뒤로는 핵과 미사일 개발에 여념이 없었던 그동안의 북한 행태를 보면 그렇고, 그런 북한을 제대로 다루기는커녕 남북 정상회담에 안달해 왔던 보수·진보 정권을 생각하면 더 그렇다.

북한은 김여정을 통해 문 대통령에게 하고 싶은 한 마디 한 마디를 준비해 왔을 것이다. 체류 56시간의 표정이나 동작을 보면 그가 대한민국에서 해야 할 언동을 치밀하게 계산했다는 점을 단박에 알 수 있다. 이미 자신의 언동이 한국과 국제 언론에 어떻게 반영되고, 어떤 해석을 낳을지를 시뮬레이션했을 게다. 김여정은 성공했다. 외신들이 내놓은 기사의 제목을 보면 확실히 남는 장사를 했다.

‘통일의 새 장을 여는 주역’ ‘후세에 길이 남을 자취’ ‘북남 수뇌부의 의지’ ‘동포의 정’ ‘역시 한 핏줄’ 이런 단어와 표현은 문 대통령과 최측근들의 감성과 역사에 남을 족적에 대한 성취욕·명예욕을 자극한다. 주어진 현실보다는 ‘역사와 대화하는’ 대통령이 돼 보라는 권유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걸 성취해 보라는 달콤한 메시지다. 북한은 청와대와 정부 요직에 있는 감상적 통일주의 성향의 사람들을 잘 파악하고 있다.

남한의 이들은 젊은 시절 나름대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다. 그들의 낭만적이었던 대북관이 지금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현될 수 있을까. 실현된다면 대북 정책은 성공할까. 절대 그렇지 못할 것이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어설픈 ‘우리 민족끼리’는 환상적인 구호일 따름이다. 그때는 그저 구호로 끝났지만 정책은 남북 관계와 미·중·일·러의 한반도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니 이제 문제는 우리다. 정상회담 제의로 공은 일단 우리에게 넘어왔다. 현 정권이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한반도 정세와 북·미 관계가 결정된다.

두 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대북 특사는 정치적 논란이 없는 고위급 인사여야 한다. 저쪽에서 최고지도자의 동생과 국가수반이 왔다고 우리도 들떠서 정치적 실세나 총리급을 보내야 한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남북한은 국가·정부·정치 체제가 아주 다르다. 특사가 가서 경천동지할 사안을 합의할 것도 아니다. 정상회담 여건을 만들면 된다. 그런 차원에서 주무 부처인 통일부 장관이 가는 게 마땅하다. 마침 남북대화 전문가이기도 하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과거 경력이나 국가정보원장의 고유 업무 성격상 이들이 간다면 쓸데없고 소모적인 남남갈등을 불러일으킬 게 뻔하다. 회담 추진이 어그러지면 문 대통령이 북한 이슈를 능동적으로 다룰 동력은 상실될 수도 있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신중하고 또 신중해야 한다.

둘째, 청와대 내 정상회담 추진 관련 레드팀(red team)을 만들라. 워 게임에서 적군 역할의 레드팀은 아군 약점을 포착하고 보완책을 찾게끔 하는 기능을 한다. 현 정권 핵심부와 결이 다르게 정상회담을 다뤄보고 미국 등 국제사회의 냉정한 시각으로 남북 관계를 바라보게 하자는 것이다. 실수를 줄이고 약점을 제거할 수 있다. 블루팀(정상회담 추진팀)과 레드팀 간 시각차나 갈등이 당연히 발생한다. 이를 해소하는 과정이 대북 정책의 강력한 추진 동력이다. 지난해 집권 초기 인사 난맥상이 불거지자 청와대는 인선 판단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 레드팀을 운영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레드팀을 활용했다는 흔적은 없다. 이번 기회에 정상회담 관련 레드팀을 가동하면 국민들도 안정감 있게 추진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겠는가.

지금 주변 4강은 정상회담 추진과 향후 남북 관계를 놓고 자국 이익을 계산 중이다. 우리에겐 냉혹한 현실이다. 주변 환경은 냉엄한데 업적을 남기겠다며 역사와 대화하는 환상으로 정상회담을 추진하는 순간, 냉정함과 절제된 판단력은 사라질 게다. 환상적 구호보다 조금씩 진전하는 성과를 보여줘야 한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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