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라동철] 열 번 찍겠다고? 그게 스토킹이야! 기사의 사진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미투(#MeToo)운동이 우리나라에서도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연극계의 이윤택 오태석 연출가, 문단의 고은 시인, 뮤지컬계의 변희석 음악감독, 배우 조민기 등 해당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유력 인사들의 추잡한 민낯이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고백으로 하나둘 까발려지고 있다.

상대에 대한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성적 욕망을 채운 ‘괴물’들은 문화·예술계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성범죄를 단죄해야 할 검찰 조직도 서지현 검사의 폭로를 계기로 조사단이 구성됐고 부장검사가 성추행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공직사회, 교육현장, 복지시설, 기업, 의료계, 군부대 등 어느 곳도 성폭력 범죄의 안전지대가 아닌 게 우리의 현실이다. 남성 중심의 직장 문화, 성범죄를 보고도 외면하는 침묵의 카르텔, 여성을 성적 대상화시키는 환경, 신고를 꺼리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 등이 이면에 자리 잡고 있다. 오랫동안 내려온 성과 관련된 그릇된 신화들도 성범죄 불감증을 키우는 원인 가운데 하나다. ‘여자의 노(NO)는 예스(YES)’ ‘야한 옷차림과 화장은 유혹의 신호’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다’ 등이 그런 신화들이다. 직장 내 성폭력이 사회 이슈화되면서 이런 인식에 균열이 생기고 있지만 아직도 신화에 사로잡힌 이들이 적지 않다. 여성가족부가 전국의 만 19∼64세 남녀 7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해 지난해 공개한 ‘2016년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남성 응답자의 54.4%가 ‘성폭력은 노출이 심한 옷차림 때문에 일어난다’, 55.2%는 ‘여자들이 조심하면 성폭력은 줄일 수 있다’고 답했다. 성적 욕구를 억제하지 못한 책임을 엉뚱하게도 피해 여성에게 돌리는 인식이 강고하다는 걸 보여주는 결과다.

절도, 강도, 신체적 폭행은 누구나 범죄라는 걸 안다. 그러나 성폭력, 특히 성희롱이나 가벼운 성추행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신체적 접촉이나 성적 농담, 선정적 메시지 노출은 모두 명백한 성범죄다. 무엇이 성범죄인지 확실하게 배워야 한다. 여자의 ‘노’는 말 그대로 ‘노’로 받아들여야 한다. 싫다는데도 계속 치근덕거리는 건 스토킹이며 명백한 성범죄다. 사랑은 쟁취하는 거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여자 없다는 등의 신화는 폐기돼야 마땅하다.

미투 운동의 확산으로 관행이라고 자기 합리화하며 성폭력을 반복해 온 가해자들의 설 자리는 줄어들고 있다. 처벌 강화와 성평등 교육을 통해 성범죄 불감증을 없애나가야 한다. 엄한 처벌이 정착되면 가해자들도 그것이 범죄임을 확실히 깨닫게 될 것이다. 성폭력 범죄를 감추는 사회 분위기도 바뀌어야 한다. 2차 피해 방지책을 정교하게 다듬어 신고 활성화를 유도하고 직장 내 성교육 강화를 통해 문제를 적극 해결해 가려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스토킹 범죄와 데이트 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공공부문 성희롱·성폭력 근절대책을 조만간 발표하겠다고 했다.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보완이 필요하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인식을 개선하는 데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청와대 국민청원 코너에 올린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교육 의무화’ 청원에 21만여명이 서명했는데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남성 중심 문화를 깨뜨리는 페미니즘 교육은 성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고 성범죄에 대한 자각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성범죄의 후폭풍은 파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피해자는 오랫동안 트라우마에 시달린다. 가해자는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해당 가정과 공동체는 회복되기 어려운 내상을 입기도 한다. 세상의 절반인 여성들이 잠재적 피해자인 환경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인격체임을 깨닫게 하는 페미니즘 교육은 남성들에게 더 유용할 수 있다. 조기교육을 주저할 이유가 없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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