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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톺아보기] 남북전쟁과 선교지 분할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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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전쟁은 1861년부터 4년 동안 이어졌다. 전쟁은 격렬했다. 교회들끼리 서로 등을 졌다. 미국 북장로교와 남장로교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이다. 하나였던 미국 남·북 장로교는 이 전쟁으로 갈라졌다. 노예제도가 기폭제였다. 한번 갈라진 교단은 사사건건 대립했다. 재통합은 한 세기가 지난 1983년이 돼서야 성사됐다. 전쟁 때문에 분열했지만 그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교회는 하나가 되지 못했다. 다시 하나 되는데 걸린 기간이 무려 122년이었다.

긴 이별의 시간 동안 두 교단은 선교를 위해 혼신을 기울였다. 마침 1800년대 말은 서구교회가 말하는 ‘선교의 황금기’였다. 우리나라엔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이 먼저 깃발을 꽂았다. 1884년 9월 호레이스 알렌과 이듬해 온 호레이스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 등이 모두 북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남장로교는 1892년 11월이 돼서야 선교사를 파송한다. 전남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진 벨도 1895년 미국 남장로교 소속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호주와 캐나다 선교사들도 속속 도착했다. 선교사들은 부산항과 인천항으로 들어와 일단 서울과 평양으로 이동했다. 선교사들이 몰리자 경쟁이 심해졌다. 결국 각국 선교부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안건은 ‘선교지 분할.’ 교단별로 지역을 정해 해당 지역 선교에 집중하자는 게 골자였다. 협정은 1893년 체결됐다. 이 협정은 소모적인 경쟁을 피하기 위한 묘책이었다. 하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남북전쟁으로 인한 미국 내 갈등양상이 반영된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협정으로 미국 북장로교는 평안도와 황해도에 터를 닦았다. 반면 미국 남장로교는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선교를 맡았다.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지에는 서울과 평양 인천 등 대도시가 몰려있었다. 하지만 남장로교의 사정은 달랐다. 대도시들과 비교하면 오지나 마찬가지였다. 또 선교지 분할 협정이 끝난 이듬해인 1894년 전라도 일대에선 동학농민운동까지 전개된다. 여러모로 선교사들이 활동하기엔 척박했다.

미국 남북전쟁의 희생자는 무려 60만명에 달했다. 사생결단의 혈투를 벌인 결과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꼬일대로 꼬인 감정만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남북전쟁으로 쌓인 앙금이 28년 뒤인 1893년 선교지 분할 협정 회의장으로 옮겨졌던 것은 아닐까.

유진 벨 선교사의 후손인 인요한 신촌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은 “오래된 이야기지만 남북전쟁에서 진 남장로교회가 변방으로 밀려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한국 선교사의 한편에서 구전돼 내려오는 것이다. 앞으로 학문적인 연구를 통해 세밀하게 살펴봐야 할 주제인 것만은 분명하다. 다만 2018년 선교지에서도 이와 유사한 갈등이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눈여겨 볼 일이다. 어떤 단체가 파송한 선교사인지, 어느 교단 소속인지, 또 목사인지 평신도인지…. 물론 아무나 선교사를 자처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정체가 불문명한 단체나 교단이 무자격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도 장애물이다. 하지만 선교사 파송 세계 2위 국가인 한국의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자신의 교단이나 소속 단체의 깃발을 걸고 싸우는 건 민망한 일이다. 파송 규모에 맞는 성숙함을 회복하는 길, 이미 우리가 살아 온 역사 속에서 지혜를 얻을 수 있지는 않을까.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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