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김혜림] 정월 대보름 기사의 사진
“내 더위 사 가라.” 아침 일찍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전화를 받으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밖에서 일하는 애한테 더위를 팔면 어떡해요.” 엄마의 지청구는 후렴구였다. 몇 해 전 돌아가셔서 이제는 더위를 사드리고 싶어도 사드릴 수가 없다. 하지만 정월 대보름이면 딸에게 더위를 파시며 ‘껄껄걸…’ 웃으시던 아버지가 생각나곤 한다. 올해 정월 대보름은 3월 2일이다.

양력을 쓰는 요즘 일상에서 음력은 설과 추석을 제외하고는 힘이 없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도 시들머들하다. 옛날에는 한 해를 시작하는 설날보다 정월 대보름이 훨씬 더 시끌벅적했다. 달의 움직임을 중심으로 한 음력을 사용했으니 첫 보름달이 뜨는 정월 대보름을 중시한 듯하다. 임동권의 ‘한국세시풍속’에는 192건의 세시 행사가 소개돼 있다. 그중 정월 대보름날 관련 행사가 55건으로 가장 많다.

설은 집안 행사가 주를 이루었지만 대보름에는 줄다리기 등 마을 행사가 많아 더욱 떠들썩했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금지됐던 불놀이가 허락되는 유일한 날이기도 하다. 쥐불놀이는 논두렁의 잡초와 병충을 없애고, 재가 거름이 돼 농사가 잘된다고 해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즐겼다.

대보름날 먹었다는 오곡밥, 묵은 나물과 부럼 등은 조상의 지혜가 담긴 음식으로 꼽힌다. 오곡밥은 일반적으로 찹쌀 차조 붉은팥 찰수수 검은콩 등 5가지 곡식으로 짓는다. 다수의 한의학자들은 오색이 고루 들어가 있어 오장육부를 조화시키고, 각 체질의 음식이 섞여 있는 조화된 음식이라고 칭찬한다. 묵은 나물은 겨울철에 부족한 비타민과 식이섬유를 보충하는 영양식으로 꼽힌다. 무기질 미네랄이 풍부한 나물을 햇볕에 말리면 비타민D가 더욱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대보름날 아침에 제 나이대로 깨물어 먹었다는 호두 땅콩 잣 등 견과류의 영양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대보름을 겨냥해 유통업체들이 오곡밥 묵은나물 부럼 세트들을 내놓고 있다. 오곡밥을 지어 옆집 문을 두드려 보는 건 어떨까. 대보름날 오곡밥은 다른 성(姓)을 가진 집의 밥을 세 번 이상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아진다고 했다. 이 기회에 이웃을 알게 되면 좋겠지만 뻘쭘해서 망설여진다면 오랜만에 친구들과 ‘오곡밥 도시락 모임’을 가져도 즐거울 듯하다. 또 작심삼일로 끝난 새해 결심이 있다면 대보름날을 다시 시작하는 계기로 활용해도 좋겠다.

김혜림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삽화=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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