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지훈] ‘영감님’을 기다리며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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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책을 읽다가 이런 대목에 밑줄을 그었다. 작가는 영화 ‘E.T’에서 지구에 불시착한 E.T가 창고의 잡동사니를 그러모아 통신장치를 만드는 장면을 묘사한 뒤 이렇게 적었다.

“뛰어난 소설이란 분명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재료 그 자체의 질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거기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은 ‘매직(Magic)’입니다. 일상적이고 소박한 재료밖에 없더라도, 간단하고 평이한 말밖에 쓰지 않더라도, 만일 거기에 매직이 있다면 우리는 그런 것에서도 놀랍도록 세련된 장치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저런 가르침을 전하는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다. 다들 알다시피 하루키의 작품은 ‘일상적이고 소박한 재료’를 ‘간단하고 평이한 말’로 깁고 다듬은 결과물일 때가 많다. 소설가 은희경은 언젠가 한 팟캐스트에 출연해 하루키의 작품을 거론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면 힘을 빼는 게 어려워요. 소설을 쓴다는 걸 너무 크게 생각하는 거예요. 궁리가 많은 거죠. 그럴 때 저의 말문을 열게 만드는 게 하루키의 책이에요. 특히 하루키의 단편을 읽으면 ‘이런 걸 갖고도 소설을 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소설가 지망생에겐 금과옥조 같은 조언일 것이다. 하지만 글을 쓸 때 힘을 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루키가 판에 박힌 이야기에서도 반짝이는 뭔가를 길어 올리는 건 그가 비범한 작가이니 가능한 일이다. 작가 필립 로스는 소설 ‘에브리맨’에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 간다”고 썼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그냥 일어나서 일하러(쓰러) 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을 써낼 수 있는 건 필립 로스가 필립 로스여서 가능한 것이지 보통 사람이라면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다.

펜이 요술봉으로 바뀌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영감부터 찾아야 한다. 굳이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뭔가를 해결하려면 아이디어를 구해야 한다. 그럴 때 나와 당신은 무엇부터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스웨덴 정신과 의사인 안데르스 한센이 최근 펴낸 ‘움직여라, 당신의 뇌가 젊어진다’를 소개하는 것으로 갈음할 수 있을 듯하다.

저자는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개괄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대략 이런 내용이다. 인간은 오랫동안 먹이를 구하기 위해 걷고 뛰어야 했다. 그런데 최근 100년 사이에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람들은 과거처럼 몸을 쓰지 않게 됐다. 문제는 인간의 뇌는 여전히 “수렵 채집인 선조들이 살던 아프리카 사바나 초원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몸을 움직여야 뇌가 활성화되니 창의력을 키우려면 당장 운동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뇌에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모두 소중하다는 것이다. 5분 걷기보다는 30분 걷기가 더 좋지만, 5분 걷기 역시 소중하다. …뇌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은 일주일에 적어도 세 번, 한 번에 45분 동안 달리는 것이다.”

실제로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자전거를 타다가 상대성이론을 떠올렸다. 찰스 다윈은 집 주변을 거니는 걸 좋아했다. 스티브 잡스는 ‘산책 회의’를 자주 열었다. 베토벤의 취미도 산책이었고 소설 ‘파이 이야기’로 유명한 얀 마텔은 컴퓨터가 장착된 러닝머신 위를 걸으며 글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키가 달리기 마니아라는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고백하자면 이 칼럼을 무슨 내용으로 채워야 할까 한참을 고민했다. 기가 막히게 멋진 ‘영감님’이 내 머릿속에 찾아오길 기원했지만 허사였다. 결국 나 역시도 여의도공원을 한 바퀴 걸은 뒤에야 지금 쓰고 있는 이런 내용의 칼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독 추웠던 겨울이 끝나고 저 멀리 봄이 다가오고 있다. 올봄에는 나도, 당신도 많이 걷고 뛰었으면 한다. 혹시 아는가. 인생을 바꿔놓는 근사한 영감을 갑자기 떠올리게 될지.

사무실 책장에 꽂아놓은 책을 무심결에 펼쳤다가 이런 구절에 눈길이 멈췄다. 시인 김소연이 최근 내놓은 에세이 ‘한 글자 사전’에 담긴 대목이다. “아직도 추울 뿐이지만, 봄이 짧아져서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단 생각에, ‘봄’이라는 발음을 입 밖으로 자꾸 내어 따스함을 보태본다. 봄은 그냥 봄이 아니라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기적 중 하나니까.”

박지훈 문화부 기자 lucidfall@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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