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선언 작성 땐 30년 뒤에 통일될 줄 알았는데…”

88선언 30주년 국제협의회

“88선언 작성 땐 30년 뒤에 통일될 줄 알았는데…” 기사의 사진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5일 서울 중구 라마다 서울 동대문호텔에서 열린 ‘한국교회 88선언 30주년 기념 국제협의회’에서 88선언문 작성 배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
“‘민족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을 작성할 땐 30년 뒤 한반도가 통일될 줄 알았습니다. 88선언 30주년을 기념하는 건 고마운 일이지만, 한편으론 정말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30년간 뭘 했느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남북 기독교계가 연합해 발표한 최초의 통일선언으로 꼽히는 ‘88선언문’ 편집에 결정적 역할을 한 노 교수의 고백이 행사장에 울려 퍼지자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서광선(87)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5일 서울 중구 라마다 서울 동대문 호텔에서 열린 ‘한국교회 88선언 30주년 기념 국제협의회’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협의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가 88선언 30주년을 맞아 마련한 행사다. 이날부터 3일간 ‘평화를 심고 희망을 선포하다’라는 주제로 열린다.

서 교수는 ‘분단을 살다 1: 세대 간 대담’ 순서 패널로 참석했다. 대담은 한반도 평화·통일에 있어 88선언의 의미와 중요성을 짚어보고자 마련된 자리로 서 교수를 비롯해 각 세대를 대표하는 패널 5명이 동석했다.

대담 참가자 중 유일하게 전쟁을 경험한 서 교수는 6·25 당시 목격한 아버지 죽음에 대해 전하며 분단의 아픔을 생생히 전했다. 그는 “열아홉 살 때 아버지는 전쟁 중 대동강 언덕에서 총살당했는데 얼굴에 총알 자국이 선명했다”며 “울며 시신을 수습한 후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며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당시 남한에서는 또 다른 비극이 자행되고 있었다. 반공의 이름으로 군과 경찰에게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이 적지 않았던 것. 서 교수는 “그간 ‘아버지는 반공으로 총살당한 순교자며 나는 원수를 갚을 것’이라 말했는데 전쟁 중 남쪽의 일을 알고 난 뒤에는 그런 말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이어 “희생된 이들을 생각하며 ‘분단의 아픔이 이런 것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며 “원수를 갚는다는 건 남북 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서 교수와는 달리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의 분단 체감도는 낮은 편이었다. 패널로 나선 서보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는 “66년생인 제가 대학 다닐 당시는 민주화운동 열기가 남았던 시대라 88선언에 대한 반응이 엄청났다”며 “하지만 그 이후 세대는 평화 통일과 분단에 대한 관심이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다”고 말했다. 이어 “매년 연구원이 통일 의식 관련 설문조사를 하는데 노무현정부 당시 통일 지지도가 70%인데 비해 현재는 50%가 조금 넘는 현실”이라 첨언했다.

좌중을 숙연케 하는 순간은 계속 이어졌다. ‘분단을 살다 2: 이야기 나눔’ 순서에 패널로 참석한 제주 4·3 피해자인 고완순씨는 “아홉 살 때 4·3을 겪었는데 이웃주민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여 총살당하는 것을 목격했다”며 “나 역시 총살을 기다리며 피로 얼룩진 땅 위에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사격이 중지돼 살아남았다” 증언했다. 그는 “4·3 피해자들은 연좌제에 걸려 취직도 제대로 못한 채 어렵게 살아왔다”며 “이런 자리가 마련됐다는 것 자체로 매우 행복하고 반가운 마음”이라 말했다.

이 순서에는 고씨뿐 아니라 국정원 간첩 조작으로 고통 받은 북한이탈주민과 정부의 금강산 관광지구 폐쇄로 재정적 손실 입은 피해자의 자녀도 나와 분단으로 인한 아픔에 대해 전했다.

이날 행사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와 세계개혁교회연맹(WCRC),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C USA) 등 국내외 교회지도자 200여명이 참가했다. 첫날은 WCC 총무 대행과 이홍정 NCCK 총무가 ‘한반도 평화통일을 향한 에큐메니컬 여정’을 주제로 메시지를 전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날에는 한반도의 분단 극복과 영구적 평화체제 구축을 주제로 일본, 독일, 미국 등 국제 교계 인사가 의견을 나눈다.

양민경 기자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