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전석운] 빌리 그레이엄의 레거시 기사의 사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세상을 떠난 지 보름이 지났지만 미국에서 그의 추모 열기는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소천한 목사는 지난 2일 그의 고향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럿에 안장됐다. 그러나 장례식이 끝난 뒤 목사를 그리워하는 미국인들은 더 많아진 듯하다. 그를 기념하는 국경일을 지정해 달라는 탄원이 제기된 뒤 1주일 새 7만여명이 호응했다.

폭스 방송이 지난 4일 일요일 황금시간대에 그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빌리 그레이엄: 특별한 여정)를 방영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신문과 인터넷 매체들도 그의 업적을 다룬 기사를 꾸준히 쏟아내고 있다. 왜 그를 ‘미국의 국민 목사’로 부르는지 알 만한 추모 열풍이다.

그레이엄 목사는 생전에도 미국인들이 가장 오랫동안 존경하는 인물로 꼽혔다. 그는 갤럽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 10위’ 안에 61차례 들었다. 갤럽이 1948년 같은 조사를 실시한 이후 그레이엄 목사만큼 톱 10에 가장 많이 오른 인물이 없었다. 그가 1위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2∼4위 등 꾸준히 상위에 올랐다. 조사 당시 1위는 현직 대통령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던 걸 감안하면 목사가 가졌던 도덕적 권위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그레이엄 목사는 전 세계 195개국 2억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수백만명을 회심시킨 것으로 유명하지만 미국인 중에도 6명 중 1명꼴로 그의 설교를 들었다는 통계가 있다. 그가 숨지자 지미 카터, 조지 H W 부시,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버락 오바마 등 전직 미국 대통령들은 빠짐없이 애도했다. 아들 부시는 “그레이엄 목사를 만나 술을 끊고 새 인생을 살았다”고 고백했고, 클린턴은 “11살 때 처음 만난 이후 큰 영향을 받았다”고 추모했다.

그레이엄 목사는 젊은 나이에 전국구 스타로 올라섰지만 한 번도 돈과 여자 문제로 구설에 오른 적이 없다. 미국에도 수많은 스타 목회자들이 있었지만 스캔들로 한순간 몰락한 사람이 많다. 그의 보수적 가치관을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그레이엄 목사가 도덕적으로 엄격한 삶을 살았다는 데에는 이견을 달지 않는다. 그는 전도자의 삶에 헌신하기로 한 초기에 4가지 원칙을 세우고 이를 평생 지켰다고 한다. 첫째, 월급 외에 따로 집회에서 주는 보수를 받지 않는다. 둘째, 집회 참가자 수를 자랑하지 않는다. 셋째, 다른 종교를 폄하하지 않는다. 넷째, 아내 외에 다른 여자와 여행을 가거나 식사를 하지 않는다.

목사에게도 그늘은 있다. 대부분 정치에 너무 깊숙이 개입했다는 비판이다. 아들 부시가 이라크 전쟁을 결정할 때 백악관에 함께 있어 그 전쟁을 지지한다는 인상을 줬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을 때는 그를 두둔하느라 반(反)유대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도 말년에 “때로는 (정치와 종교의) 선을 넘었다”며 후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용기가 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자신에게 분노한 유대인들을 찾아가 “무릎으로 기어오라고 해도 그렇게 하겠다”며 용서를 빌었다. 동성애 반대론을 펴는 과정에서 “에이즈는 천벌”이라고 말했다가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기도 했다.

그가 떠나면서 가장 큰 위기를 맞은 곳은 그가 이끌던 복음주의(evangelism) 교회들이다. 미국인 4명 중 1명이 복음주의 교회에 다니고 있을 만큼 여전히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만 비중은 조금씩 줄고 있다. 무엇보다 복음주의가 과도한 백인 중심의 보수주의로 흐르면서 30대 이하 젊은이들이 외면하고 있다. 특히 진보적인 비백인 신자는 급격히 줄고 있다. 그의 아들 프랭클린 목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과도하게 유착된 것도 복음주의의 위기로 꼽히는 요인이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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