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감성노트] 권력과 폭력 기사의 사진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인간은 이성적으로 판단한 후에 행동하기보다 감정에 따라 행동한 후에 이성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려는 속성이 더 강하다. 일단 저지르고 난 뒤에 이유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내려고 한다. 부정을 저지른 뒤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자기 합리화에 능한 사람일수록 부정을 저지르는 것에 대한 심리적 저항도 적다. 이런 사람은 더 자주 거리낌 없이 규칙을 어긴다. 언어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으면 죄책감도 못 느낀다. 한 발 더 나아가 잘못을 하고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꽤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스스로를 속인다. 그래서 자기기만(self-deception)을 두고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사태를 알아차린 한 인간이 어떻게 해서든 반대의 사태를 믿고 마음의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것일 게다. 이렇게 보면 “거짓말도 머리가 좋아야 하지”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것 같다. 지적 능력이 뛰어날수록 남을 잘 속이고 자신도 그럴 듯하게 과장할 수 있을 테니까.

폭력도 말로 합리화하는 데 능한 사람이 저지를 때가 가장 무섭다. 이런 사람은 언어적으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함으로써 가해자인 자신을 무고의 피해자로 만들고,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데 능하기 때문이다. 이성에 의해 폭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권력자는 “나의 행동은 대의를 위한 것이니 그냥 넘어가자. 모두 잊어라”라며 폭력을 받아들이도록 강압할 수 있다. 권위에 저항하지 못하고 폭력을 참아야만 했던 피해자는 “나는 왜 그때 강하게 저항하지 못했을까”라며 자신을 비난하게 된다. 피해를 보고도 “내가 바보 같아서 이런 일을 당한 것이다”라며 자책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며 절망에 빠진다. 폭력을 휘두른 머리 좋은 권력자는 정교한 자기기만으로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잘 사는데 말이다.

권력을 갖게 되면 타인의 고통에 둔감해져 폭력을 휘두르고도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줬는지 잘 모르게 된다. 권력이 강해질수록 타인의 정서를 인식하는 능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행복, 슬픔, 분노를 담은 얼굴 사진을 보여준 뒤 각각의 얼굴이 어떤 감정 상태인지 맞혀보라는 테스트를 하면 자신의 권한이 강하다고 인식하는 사람일수록 많은 오류를 범한다. 힘이 있다는 인식이 타인의 정서를 정확히 지각하는 정서조망수용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사회나 회사 조직에서 권력자는 노골적이기보다는 교묘하게 폭력을 휘두른다.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회의실에서는 젠틀한 척하다가 단 둘이 남게 되면 표정을 싹 바꾸고 폭언을 쏟아낸다. 그러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씩 웃으며 다독여준다. 나도 직장생활을 했을 때 위계에 의한 언어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마음의 상처가 깊게 났지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었다. 상사의 폭언은 언제나 단둘만 있는 공간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없었고, 그러니 혼자 참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폭력의 피해자가 왜 참고 있을 수밖에 없는지는 직접 당해보기 전까지는 그 이유를 제대로 다 알기 어려운 법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휘두르는 폭력에 저항하면 그들은 다른 형태의 폭력으로 힘없는 이를 괴롭힌다. 직장 상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임이 있으니 참석하라고 해서 나갔더니, 자신만 부른 것이어서 단둘만 술자리를 갖게 되었던 여자 직장인을 상담한 적이 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노골과 은밀을 넘나드는 상사의 유혹에 소름이 돋았다고 했다. 너무 괴로워서 부모님이 편찮으시다는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부터 상사는 교묘한 방식으로 그녀를 괴롭혔다. 아무도 없으면 폭언을 하고,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워 부당한 업무를 강요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는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상사의 은밀한 폭력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끝내 회사를 스스로 그만두고 말았다.

폭력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그것을 합리화할 수 있는 이성과 언어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많이 배우고 똑똑한 사람이 더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권력을 가진 자는 폭력이 일으키는 타인의 아픔에 둔감하다. 힘을 가졌다는 인식이 공감능력을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지능이 폭력을 정당화하고, 권력은 그것을 정교하게 만든다. 그러니 머리 좋은 권력자는 끊임없이 자기를 검열하고 자신을 더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에 쉽게 물들어버리고 말 테니까.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그래픽=공희정 기자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