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⑥ 전주선교사묘역

자녀 잃는 고통 이기고 척박한 땅에 복음 일군 영혼의 힘

[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⑥ 전주선교사묘역 기사의 사진
오기완 충북대 부총장이 전북 전주 완산구 전주선교사묘역에 있는 윌리엄 전킨 선교사의 묘비(가운데) 등을 설명하고 있다. 전주=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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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히 11:35∼38)

광주양림선교사묘원 언덕길을 내려오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땅에 온 선교사들이 당한 고통이 히브리서 기록과 같은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의 열악한 환경에서 선교사들은 30, 40대 나이에 쓰러지고 말았다. 대부분 의사였음에도 전염병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어린아이들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다. 자녀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선교사들의 고통은 어땠을까.

나는 언제 성도가 되는가

선교사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행적을 보며 불쑥 ‘나는 언제 성도(聖徒)가 되는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 입에서 찬양이 흘러나왔다. “성도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성도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광주 서북쪽으로 영산강이 흘렀다. 4대강 준설사업으로 자전거도로가 잘 나 있어 걷기가 좋았다. 숙소인 전남 담양으로 향하는 길은 계속 강둑을 따라 걸어야 했다. 전남 담양에 들어서면서 숙소 주인의 제안으로 죽녹원에 들렀다. 빼곡한 대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사각사각 바람 소리가 청량감을 줬다. 하늘 높이 쭉쭉 뻗은 초록빛 대나무와 댓잎들 사이에서 쏟아지는 햇살이 좋았다. 전망대에 오르니 담양의 명물 메타세콰이아 가로수길이 한눈에 보였다.

섬진강 상류의 옥정호를 끼고 산길을 걸었다. 광주를 출발한 지 4일 만에 전북 순창 북흥면을 거쳐 전주 시내에 들어섰다. 전주천변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갔다. 어렵게 전주 완산구 전주예수병원 건너편 언덕에 있는 전주선교사묘역을 찾았다.

혼란기 속 태동한 전주선교

전주 초기 선교 사역은 어수선한 조선 정서에서 시작됐다. 당시는 동학혁명으로 민심이 흉흉할 때였다. 미국 공사관에선 선교사들의 호남 진출을 만류했다. 선교사들은 믿을 만한 조선인을 선임해 파송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미국 남장로교 ‘7인의 선발대’로 1892년 한국에 발을 디딘 윌리엄 레이놀즈 선교사는 전주 선교를 위해 자신의 한국말 선생인 정해원을 파송했다.

전주에 도착한 정씨는 서문 밖 개천 너머 은송리에 터를 잡았다. 이곳은 변두리이기는 하지만 시장이 가까워 장터 전도가 쉽고 민심을 살피기엔 안성맞춤이었다. 1893년 정씨가 초가 하나를 마련해 예배를 드린 곳이 바로 전주서문교회다. 미국 남장로교에서 세운 호남 최초의 교회다.

레이놀즈 선교사와 함께 7인의 선발대였던 루이스 테이트 목사와 누이동생 메티 테이트 선교사는 전주에 정착할 목적으로 1894년 1월 서울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자리를 잡자마자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발발해 서울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 됐다. 정세가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1895년 3월 레이놀즈와 테이트 목사가 육로를 통해 다시 내려왔다.

1897년 7월 레이놀즈 선교사의 집례로 조선인 남자 2명과 여자 3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후 미국 남장로교 소속 루터 올리버 매큐첸 선교사와 미국 감리교 조세핀 하운셀 선교사 등이 정착하게 됐고 복음 확산에 가속도가 붙었다.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으로 지역에 큰 피해가 있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상실감이 컸던 지역 주민들 마음속에 복음이 빠르게 파고드는 계기가 됐다. 전주서문교회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전주예수병원 등이 복음의 베이스캠프 역할을 했다.

풍토병에 스러져 간 선교사 자녀들

전주선교사묘역에는 윌리엄 전킨 선교사를 비롯해 1898년 전주예수병원을 세운 매티 잉골드 의사 등 선교사와 가족 14명의 묘비가 있다.

군산 선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전킨 선교사의 묘비 바로 앞에는 시드니, 프랜시스, 조지의 묘비가 있다. 전킨 선교사는 군산 선교의 개척자로 1904년부터 4년간 전주서문교회 담임목사를 역임했으며, 군산 영명학교를 세웠다. 부인 메리 레이번은 기전여학교 초대 교장을 지냈다. 기전여학교의 ‘기전’은 ‘전킨 선교사를 기념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선교사들은 조선의 잦은 풍토병으로 고생했다. 전킨 선교사의 세 아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3년 4월 큰아들 조지는 태어난 지 1년 만에, 1899년 시드니도 2개월 만에 사망했다. 1903년 프랜시스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는데 태어나자마자, 또는 얼마 안 돼 생을 마쳤으니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으랴. 선교사들의 묘지를 둘러보며 자녀를 잃는 고통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복음 전파를 위해 척박한 땅을 일군 강력한 영혼의 힘을 묵상했다. 그들의 끊임없는 한국 사랑의 메시지가 안일한 시간을 보내는 나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전킨 선교사는 16년간 헌신적 선교활동으로 호남 선교의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선교 중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말에서 떨어져 갈비뼈가 부러졌고 세 번의 편도선염을 겪었다. 편도선 제거 수술을 할 때는 마취가 충분히 되지 않아 너무 힘들었다. 내 어린 것들은 집에서 의사도 없이 태어나 며칠 후 폐렴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자녀의 죽음 앞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놓지 않았다. 1908년 폐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선교사의 삶은 사랑이 넘치는 삶이며 행복이 넘치는 삶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지금도 복음의 종소리 울리는 듯

하천을 따라 조금 내려가니 전주 완산구 전주천로에 전주서문교회가 있었다. 전킨 선교사의 부인 레이번은 남편의 숭고한 선교 업적을 기념하며 종을 주문해 교회에 헌납했다. 직경 90㎝였던 종은 미국을 출발해 기선을 타고 태평양을 건너 인천, 만경강 포구, 김제 쌍강포를 거쳐 쇠달구지에 실려 교회까지 왔다.

서문교회는 1908년 종을 매달기 위해 6m80㎝ 높이의 종각을 세웠다. 안타깝게도 종은 일제가 1942년 전쟁 무기를 만든다며 수탈해갔다. 교회는 해방 후 국내에서 비슷한 모양의 종을 구해 달아 놨다. 전주서문교회의 종각은 지금도 그대로 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 종각으로 알려져 있다. 110년 전 전킨을 애도하며 울려 퍼진 맑은 종소리는 20리 밖까지 들렸다고 한다. 그 복음의 종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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