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재열] 왕도정치에서 네트워크 개인주의로 기사의 사진
미투 운동은 성폭력을 폭로하지만 사회 전반의 위계와 갑질에 대한 문화혁명적인 요소도 있다
도덕성과 공정성을 잃으면 왕도정치는 조폭논리 돼…
젊은 세대 변화로 개인적 자유주의 가치도 분명해져


현직 검사의 폭로로 촉발된 ‘나도 피해자’라는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진보·보수도 불문하고 정의와 인권을 외치던 이들조차 권력을 차지한 뒤 얼마나 많은 여성들에게 갑질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종교계도 예외는 아니다. 참신해 보이던 잠재적 대권 주자는 일순간에 무너졌고, 논란의 중심에 섰던 연기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성들이 아예 여성들과의 교류와 접촉 자체를 피하는 ‘펜스 룰’을 지킨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열풍처럼 번진 미투 운동은 남녀 간 성희롱과 성폭력을 폭로하지만, 사회 전반의 위계와 갑질에 대한 문화혁명의 요소도 갖고 있다. 미루어 짐작건대 이주민이나 탈북민은 취약한 지위로 인해 훨씬 심각한 피해자일 것이다.

한국인의 ‘마음의 습관’은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만큼 익숙하기 때문이다. 반면 일본의 철학자 오구라 기조는 한국인이 왜 유독 도덕 지향적인지, 그리고 갑질을 둘러싼 사회적 분노가 심심치 않게 표출되는지 이기론(理氣論)으로 풀었다. 정보화시대 한국인에게 600년 전 주자(朱子)의 논리를 들이대다니 시대착오 아닌가. 그러나 설득력이 있다.

리(理)는 선한 맑은 도덕성이고, 기(氣)는 탁한 육체성이라는 것이다. 극기와 수양으로 상승하는 이가 ‘님’이고, 탁한 기를 벗어나지 못한 열등한 존재가 ‘놈’이 되는 이상적 위계질서, 이것이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요체다.

등단 추천권을 가진 거장을 문하생이, 공천권을 가진 정치 지도자를 가신 그룹이, 출연권을 쥔 감독을 배우가, 그리고 학위 통과를 결정할 교수를 학생들이 부르는 공통 명칭인 선생‘님’에 이런 질서가 배어 있다. 윗사람의 도덕성과 능력에 대한 신뢰를 드러내는, 위계적이고 전인격적으로 맺어진 인간관계가 반영된 경어법이다. 윗사람도 그냥 이름으로 부르는 평등한 서구와 전혀 다르다.

그런데 현실에서 도덕성과 공공성을 잃으면 왕도정치는 조폭 논리로, 공동체는 폐쇄적 파벌로 변질된다. 피해자에게 ‘괘념치 말거라’고 보낸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문자에는 그런 논리가 함축돼 있다. 지도자의 도덕성에 대한 기대가 높을수록, 그것이 깨졌을 때의 배신감과 사회적 분노도 커진다.

우리는 지도자에게 여전히 세종대왕과 같은 왕도정치를 기대한다. 반면 미국 헌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이 고민한 문제는 지도자에 대한 견제를 어떻게 제도화하느냐였다. 구대륙에서 전제 왕정에 시달렸던 청교도들에게 최대의 관심은 선거로 뽑힐 ‘잠재적 폭군’으로부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방어할 수 있는 다양한 안전장치였다. 이들에게 민주주의의 요체는 지도자에 대한 ‘불신을 제도화’하는 것이었다.

들불처럼 번진 미투 운동에서, 정유라 부정입학을 반대한 이화여대 학생들의 지도자 없는 마스크 시위에서, 그리고 아이스하키 남북한 단일팀 구성을 둘러싼 2030세대의 문제 제기에서 공통으로 확인되는 것은 탈인습적이고 탈권위적인 개인주의자의 등장이다. 경제적 풍요 속에 태어나 뜨거운 경쟁에도 불구하고 부모 세대보다 더 나은 삶을 기대하기 어렵게 된 첫 세대인 이들은 공정성에 특히 민감하다.

어떻게 개인주의 사회가 되었나. 마을이 사라지고 전 국민 대부분이 아파트나 공동주택에 살다 보니 공간적 밀집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소속감은 없다. 1인 가구가 급증해 각자도생하는 개인에게 민족이나 집단을 위한 양보 요구는 제대로 먹히지 않는다. 왕도정치의 토대가 된 경연(經筵)에 견줄 ‘님’들에 대한 교육과 도덕적 견제의 수단이 사라진 터에 ‘님’을 존경할 이유도 없다.

반면에 ‘네트워크로 연결된 개인’들은 대규모 조직 없이도 공감과 지지를 통해 세상을 바꿀 만큼 조직화가 가능해졌다. 공공성 개념 없는 공주‘님’을 끌어내린 촛불시위가 대표적 사례다. 개인 인권과 자유의 존엄성을 중시하는 이들의 등장을 통해 ‘집단적 반공주의’가 아닌 ‘개인적 자유주의’ 가치도 분명해졌다. 젊은 세대의 변화는 마음의 습관까지 바꾼 문화혁명과 유사하다. 다만, 오인된 대상을 향한 마녀사냥의 여지도 커졌다.

상황이 이러한데 한국의 정당들은 아직 이들이 요구하는 가치를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남북과 북·미 간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이 넘치는 이때, 수령‘님’을 위해 모든 인민의 헌신을 강요하는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북한과의 협력이나 통일도 이들에게는 미완의 성취로 보일 것이다.

젊은 개인주의자들이여, 블록체인의 시대, 미래 한국의 주인이 되기를 기대한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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