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호 칼럼] 문 대통령의 품격 있는 사과 어떤가 기사의 사진
공식 인정 않더라도 베트남전 때의 민간인 살상 문제를 진정성 있게 포괄적으로 사과하면 우리가 당당해져
브란트의 무릎 꿇은 사죄가 독일 재통일 계획의 상징적 출발점이 됐다는 점은 2차대전 이후의 역사가 증명

정갈한 검은 코트에 공손히 두 손 모은 채 무릎 꿇고 묵념하는 그 사진 한 장. 1970년 12월 7일, 추적추적 진눈깨비가 내린 뒤 폴란드의 바르샤바 국립묘지 위령탑을 찾은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 나치의 폴란드 유대인에 대한 만행을 사죄하는 그 자세가 얼마나 의외였던지는 사진 속 허둥대는 사진기자들의 모습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묵념을 마친 브란트에게 기자가 묻는다. “총리께서 한 행동이 무슨 의미입니까.” 총리의 대답은 간결하다. “인간이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한 가지 행동을 했을 뿐입니다.” 세계 언론들은 이렇게 평가한다.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 브란트의 진정성은 국제사회가 갖고 있었던 전쟁범죄 국가 독일의 개념을 바꿔 놓기 시작한다.

일본군 위안부 사과 등 과거사 문제만 나오면 독일과 일본의 태도가 비교된다. 특히 강경 보수 우파로 치닫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와 내각을 평가할 때 그렇다. 한사코 거부하는 일본에서 21세기 문명국의 다른 한 면을 본다.

문재인 대통령이 22∼24일 베트남을 국빈 방문한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는 미묘하고도 불편한 게 있다. 단지 과거에 싸웠다는 점이 아니다. 민간인 살상 문제다.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도 아니고, 한국 정부도 베트남 정부도 공식적으로 제기한 적이 없다. 베트남의 사과 요구도 없다. 베트남은 자기네들이 전승국인데 패전국으로부터 사과 받을 이유가 없다는 자세다. 다만 양국 시민사회에서 민간인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매듭짓고 가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지금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베트남의 여러 마을 입구에는 한국인 출입금지 푯말이 세워져 있다. 처참한 죽음을 설명해 놓은 곳도 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이 이번 방문에서 민간인 문제에 대해 확실하게 진전된 자세를 보이는 게 좋겠다. 참전에 대한 사과가 아니다. 전투 과정에서 발생했을지도 모를, 또는 발생했던 민간인 살상 문제에 대한 사과다.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포괄적으로 부끄러운 과거사에 대해 진정성 있는 자세로 사과하는 건 지금 시점에서 상당히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우리가 당당해진다. 한국이 일본에 위안부 사죄를 요구하는 것은 알량한 배상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사과다. 그런데 월맹군과의 교전 외에 민간인을 대상으로 우리가 가해자였던 상황을 부인할 수 없다. 대통령이 사과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이성적으로, 그리고 국제사회의 문명국으로서 한국은 일본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대일 요구의 정당성도 높아지게 된다. 둘째, 문 대통령이 표방한 신남방정책에 탄력을 줄 수 있다. 아세안 국가들과의 평화적 번영과 협력을 한 단계 높이는 상징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힘으로 주변국을 굴복시켜 역내 패권을 추구하는 중국을 대하는데 전략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아주 유리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

넷째, 무엇보다 향후 한반도 평화와 통일 추진 과정에서 주변국들의 결정적 도움을 얻는 데 보탬이 된다. 불가측한 통일의 과정에서 주변 4강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나머지 주변국들이 우리 편에 서면 큰 도움이 아닐 수 없다. 폴란드는 훗날 통독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혀 독일의 진정한 노력에 화답한다.

사과가 느닷없는 것도 아니다. 노태우 대통령 때 수교를 한 이후 역대 대통령은 모두 베트남을 방문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처음으로 베트남 공산당을 창건한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를 참배했고, “본의 아니게 베트남 국민에게 고통을 준 데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고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호찌민 묘소에서 묵념한 뒤 “마음에 빚이 있다”고 했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도 그 묘소를 참배했다.

다시 브란트로 돌아가 보자. 무릎 꿇은 사죄에 서독 보수 진영은 물론 지지자들조차 그를 맹비난했다. 하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킨 전범국에 대해 유럽국들이 갖고 있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는 데 큰 계기가 됐다는 점은 역사가 평가한다. 결과적으로 진정성 있는 사죄는 통독 프로젝트인 동방정책, 나아가 유럽 통합의 상징적 출발점이었다. 주변국들이 반대했다면 독일의 재통일은 이뤄질 수 없었다. 폴란드 위령탑을 찾기 8개월여 전인 70년 3월 19일, 브란트는 동독을 방문해 분단 후 최초로 동서독 수뇌회담을 성사시킨다. 2차는 5월 서독에서 열린다. 그리고 12월, 브란트가 무릎 꿇고 사죄한 것은 아마도 자신이 정교하게 짜놓은 계획의 한 부분이었으리라. 당시 독일과 지금 우리 주변을 단순 비교하는 건 어리석다. 그러나 역사라는 큰 관점에서 본다면 본질은 같다.

김명호 수석논설위원 m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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