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손병호] 외교장관의 존재감이란 기사의 사진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2004년 3월에 장관이 돼 14년 이상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회한 베테랑 외교관이 글로벌 외교 현장에 나타나면 존재감부터 다르다. 오랜 경륜에서 묻어나오는 표정과 제스처 하나하나가 상대를 압도하고, 다자 외교장관 회담에서는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다. 지난 19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현직을 유지하면서 외교담당 국무위원 자리까지 꿰찬 왕이 외교부장도 6년째 장관을 하고 있다. 주요 2개국(G2) 외교장관으로서의 프라이드가 강한 인물이고, 웬만한 외국 정상과는 맞먹으려고도 한다. 이제 정치적 위상까지 높아졌으니 앞으로 외교 현장에서 얼마나 더 위세를 부릴지 미뤄 짐작할 만하다.

최근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이 취임 1년 만에 경질됐지만, 근래 미국 국무장관은 힐러리 클린턴, 존 케리 등을 비롯해 대선주자급 정치인이나 대통령의 최측근들이 맡아 왔다. 또 대통령 임기 4년을 같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치권에서 일정한 ‘지분’을 가진 인물들이어서 대통령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틸러슨이 망신스럽게 쫓겨난 것도 여권 내 정치적 위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보리스 존슨 외교장관이나 지난주 물러난 지그마어 가브리엘 전 독일 외교장관은 총리감으로 꾸준히 물망에 오른 헤비급 정치인들이다. 일본의 고노 다로 외무상도 집권 자민당의 잘 나가는 정치인이고 차기 총리 여론조사 때 꼬박 이름이 등장한다.

이렇듯 주요국 외교장관의 위상은 막강하다. 외교장관 위상은 그 자체가 곧 외교력으로 이어진다. 위상이 높으면 밖에 나가 그만큼 더 예우 받고, 그런 인물들이 뭔가 결정하거나 요구하면 물리치기 어렵다. 특히 풍부한 정치 경험이 밑받침되면 협상력이나 상황 돌파력도 뛰어나기 마련이다.

반면 한반도를 둘러싼 매머드급 이벤트들이 줄줄이 예정돼 있지만, 한국 외교장관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정상회담을 잡는 건 백악관과 청와대이나 협상 단계에서는 외교부가 주도할 것이란 희망 섞인 얘기가 흘러나오지만, 요즘은 외교적 협상도 ‘정치적 결단’에 자리를 내주는 게 추세가 됐다. 일본군 위안부 합의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 중국과의 사드 갈등 봉합,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등도 외교적 협상보다 정치적 결단이 우선시돼 이뤄진 조치다. 과거사 및 영유권 분쟁으로 수년간 냉랭했던 중국과 일본이 오는 5월에 정상회담을 앞두게 된 것도 일본 외무성이 아니라, 자민당 2인자인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이 오래 전부터 물밑에서 중재했기 때문이다. 글로벌 외교 현장에 갈수록 그런 풍경이 많아질 것이다.

과거 집권당 출신 중진 정치인들에게 ‘대통령 수업’을 시킨다는 이유로 장관을 시키긴 했지만 통일, 복지, 문화장관 등에 집중됐다. 반면 외교장관은 외교가 전문 영역이라는 이유로, 또 외국어도 못하면서 어떻게 외교를 하느냐는 ‘외교 마피아’들의 반대 논리 때문에 정치인들이 입성하지 못했다. 현 정부 들어 4강 대사를 임명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외교부 선배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까지 나서 4강 대사는 주재국 언어와 영어 등 외국어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공개적으로 지적했다.

그러나 당시 반대 목소리를 낸 이들에게 노련한 정치인 출신인 노영민 주중대사가 아니고, 중국어 잘 하는 외교관 출신이 베이징에 가 있었으면 과연 사드 사태가 이만큼이라도 봉합될 수 있었을까 되묻고 싶다.

때문에 차기 외교장관은 힘 있는 정치인이거나 대통령의 최측근이 가는 게 좋겠다. 차기 지도자 수업을 위해서도 외교 경험이 아주 중요해진 시대이기도 하다. 정치인들부터도 장관이든 대사든 외교 관련 자리를 적극적으로 노려야 한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단숨에 ‘트럼프 후계자’ 얘기를 듣게 된 것도 지난 1년간 외교무대에서의 활약 덕분이다.

손병호 국제부장 bhson@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