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김혜림] 미투는 인권의 문제 기사의 사진
지난 주말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과 만났다. 20, 30대 ‘리즈 시절’로 돌아간 우리는 ‘미투(MeToo)’ 열전을 펼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투도 ‘위드유(With You)’ ‘미퍼스트(Me First)’도 아닌 ‘미폴트(Me Fault)’라고 할 수 있겠다. ‘나도 잘못했다’고 고백하며 반성했다.

군필자라야 입사원서라도 낼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여자대학에서 남녀차별 없이 균등한 기회를 누렸던 우리는 그야말로 천둥벌거숭이였다. ‘여자라서 안 된다고요?’ ‘우리도 할 수 있어요!’를 입에 달고 있었던 우리는 모난 돌이었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장도리와 정, 살아남을 궁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될성부른 떡잎’으로 인정받기 위해 성희롱쯤은 웃음으로 넘겼다. “그래, 사회생활 잘하겠어” 이렇게 말하며 어깨에 팔을 두르면 속으론 눈을 흘겨도 입으론 “감사합니다” 인사까지 했다.

그렇게 십수 년을 버티면서 굳은살이 잡혔을 때 성희롱이 공론화됐다. 1993년 한국판 미투의 시조새라고 할 만한 서울대 우모 조교가 등장했다. 그는 지도교수에게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발했다. 1999년 남녀고용평등법과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에 성희롱 금지가 규정되었다. 그때 우리는 이미 웬만한 농담에는 한술 더 뜨는 여장부가 돼 있었다. “무슨 재미로 살라는 거야. 가벼운 농담, 그거 사회생활의 윤활유지” 운운하는 남자 동료들에게 기꺼이 맞장구를 쳤다. 가벼운 성희롱에도 발끈하는 여자 후배들에게 ‘그 정도는 참아야 한다’는 처세술을 강요했다. 신입 여사원들이 너무나 까탈스럽다는 남자 동료들에게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좀 심하게 손버릇이 나쁜 상사나 동료 옆에는 여자 후배 대신 스스로 앉는 것으로 의무를 다했다고 의기양양했다.

그때 우리가 성희롱과 성추행을 일삼는 동료와 상사를 좀 더 잡도리했다면 나름대로 유능한 정치인들과 뛰어난 예술인들을 잃지 않아도 됐을지 모른다. 그리고 지금 들불처럼 일어난 미투를 남성 대 여성, 그 프레임에 가둬 놓는다면 더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다.

지금 세상에 나온 미투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그리고 가해자는 남성들이다. 착시를 불러일으킬 만하다. 하지만 미투는 여성 대 남성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글을 쓰는 지금 한 여성 감독의 이름이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있다. 바로 여성 연기자를 성폭행한 여성 감독이다. 군인 경찰 내에서 발생한 미투 고발도 슬슬 시작되고 있다. 피해 당사자는 대부분 남성이다. 일반 직장에서도 남성들의 피해 사례가 적지 않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직장 내 괴롭힘 실태와 제도적 규율 방안’에 따르면 직장인 중 15.0%가 성희롱 관련 상담 경험이 있다. 이 가운데 여성의 성희롱 상담 경험 비율은 전체(480명)의 17.5%였고, 남성(665명)은 13.1%였다. 성별 격차는 4.4% 포인트밖에 되지 않는다. 더구나 지난 6개월간 평균적으로 경험한 성희롱 횟수는 남성(6.79회)이 여성(5.79회)보다 많았다.

미투는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갖지 못한 자를 성적(性的)으로 괴롭힌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남녀 성 대결이 아니다. 인권의 문제다. 미투는 가해자가 자신이 가진 힘에 기대어 피해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짓밟은 사건이다. 이에 대해 일부 남성들이 여성들과 회식 안 하기, 회의에 여성 참석시키지 않기 등등 ‘펜스 룰’로 대응하고 있다. 어리석은 짓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에 딴죽이나 걸고, 유리천장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할 뿐 무슨 소득이 있겠나. 어렵사리 입을 연 이들을 응원하고 독려해야 한다. 그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를 위해서다. 미투 운동을 성희롱, 성추행, 성폭력은 물론 집단따돌림, 괴롭힘, 학대 등을 추방하고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김혜림 논설위원 겸 산업부 선임기자 ms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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