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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역사여행] 기생쯤으로 여김받은 교회 자매 무대서는 늘 찬송 불렀다

우리나라 최초 성악가 윤심덕과 서울 YMCA

[한국기독역사여행] 기생쯤으로 여김받은 교회 자매 무대서는 늘 찬송 불렀다 기사의 사진
윤심덕 (1897∼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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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사람마다 윤심덕양의 정사를 말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 그저 불쌍하다는 이도 있고, 참으로 이상한 일이 많다는 이도 있고, 어떤 사람은 미친년이라는 이도 있고, 잘 죽었다는 이도 있고, 세상은 나쁜 세상이야 하는 말들이 많았다. 딸 가진 자 아들 가진 자 누이동생 가진 자는 웃지 마라. 이것이 남의 집 일이 아니다. …다 각각의 문제인줄 알고 생각하자.’(잡지 ‘청년’ 1926년 9월호 ‘웃지마라그책임을뭇자’ 중)

우리나라 최초의 성악가 윤심덕은 1926년 8월 3일 ‘실종’됐다. 일본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소위 ‘관부연락선’ 1등석에 탑승한 후 행방이 묘연했다. 와세다대학 출신 극작가 김우진(1897∼1926)과 함께였다.

당시 신문은 이 두 사람의 실종을 대서특필했다.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 남녀의 정사(情死)’ ‘단신으로 섭세(涉世·세상 살아감)한 윤씨와 백만장자 김씨의 최근’이라는 제목으로 전면을 할애하다시피 했다. 재벌 집 아들을 사랑한 ‘흙수저’ 여인을 다룬 요즘 드라마 같다.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옆을 지날 즈음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하였는데….’ 본문 기사다.

그들의 투신을 본 사람은 없었다. ‘팩트 체크’를 하자면 전날 승무원이 본 것이 전부였다. 실종 후 1등선실에선 짐을 각자의 집으로 부쳐 달라는 내용의 메모만 발견됐다. 결국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그들이 이탈리아에서 악기상을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실종’만이 팩트였다.

하지만 모든 언론은 ‘현해탄 투신 정사’로 규정하고 추측 기사를 쏟아냈다. 사실상 특종을 한 동아일보는 5회 연재와 후속기사를 통해 ‘현해탄 정사의 주인공 윤심덕’에 포커스를 맞췄다. 마치 배우 최진실의 자살만큼이나 요란한 보도였다.

1920년대 황색저널리즘이 신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남자와 염서(艶書), 편애와 실성’의 헤드라인에서 볼 수 있듯 인권이 없었다.

윤심덕이 유학 중 ‘남자를 사귀었다’며 7명의 성(姓)을 그대로 쓰고, 동포 교회에 다니는 것을 두고 남자 만나러 다니는 듯한 뉘앙스로 보도했다. 심지어 신여성에게 가해지는 집요한 보도에 지친 윤심덕이 어릴 적 자신을 이끌어주던 목사의 선교지인 중국 하얼빈으로 피신하자 “남자를 몰래 만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성 가십을 쏟아내기도 한다.

‘경성 여류음악가로 갈채를 받던 윤심덕은 근래 낙산 부호 이용문의 애첩이 되어… 이용문이 기첩을 데리고 수렵을 떠나자 윤심덕은 약간의 금전을 얻어 가지고 하얼빈(교회)으로 뺑소니 쳤단다.… 하여간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더니 윤심덕은 금전 앞에선 처첩의 구별이 없는 모양이다. 예술가인지 예술가(穢術嫁·더러운 술수로 시집가다)인지.’(잡지 ‘개벽’ 1925년 2월호)

김우진은 목포 부호의 아들이었고 결혼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본인 간호사를 사랑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윤심덕을 사랑했다는 기록은 없다. 윤심덕도 누구를 사랑했다고 고백한 기록이 없다. 또 처첩문화가 용인되던 시절 두 사람이 살림을 차렸다 한들 손가락질하거나 뜯어말릴 시대 분위기도 아니었다. 문제는 윤심덕에게 가해진 첩, 호색녀, 정사 등의 부정적 내용은 ‘팩트 체크’가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왈녀’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그는 쾌활한 예술가였다. 키가 180㎝ 가까이 되는 왈녀가 남자 동기 유학생들에게도 “야” “쟤” 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이러한 파격행동은 가부장제 남성들에게 관음의 대상이 됐다. ‘창가’하는 기생쯤으로 보고 배설적 이지메(집단 괴롭힘)를 가했다.

‘신여성’에게 가해진 관음적 타살

사후 90여년이 지난 지금도 윤심덕의 소설적 스토리텔링은 계속된다. 곧 신혜선 주연 SBS드라마 2부작 ‘사의 찬미’가 방영 예정이다. 1991년 영화 ‘사의 찬미’는 장미희 임성민이 주연을 맡은 바 있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이 실종 2∼3일 전 취입한 염세적 번안곡이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윤심덕이 있다. 그가 모태 신앙의 ‘교회 자매’라는 것이다. 지난 주말 서울 종로2가 YMCA 앞. 국제마라톤 행사 관계로 시내 곳곳이 통제되고 있었다. 텅 빈 대로에 서자 YMCA빌딩과 그 옆 종로타워빌딩(일제강점기 화신백화점 터)이 한눈에 들어왔다.

YMCA빌딩은 1961년 공사를 시작해 67년 완공됐다. 지하 1층 지상 8층으로 대지면적 3114㎡에 연면적 1만3668㎡다. 1960년대 한국 모더니즘 건축양식을 대변한다. 앞서 이 자리에는 1908년 완공된 종로중앙기독청년회관 적벽돌 건물이 있었다. 하지만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그해 9월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불태워 버렸다.

그 옛 건물에서 조선 청년들에게 복음이 퍼져나갔으며 을사늑약 반대, 고종양위 반대, 개화자강운동 등이 펼쳐졌다. 또 2·8독립선언, 3·1독립만세운동의 근원지였고 물산장려운동, 농촌운동 등이 발원된 현장이기도 했다.

윤심덕은 1922년 동경음악학교(우에노음악학교)를 마치고 귀국해 이듬해 6월 26일 바로 이 회관 강당에서 첫 음악회를 갖는다. 당시 이 회관은 명동성당과 함께 우뚝한 시내 최고(最高)·최신 공법의 건물이었다. 서양음악을 소화할 음향시설을 갖춘 유일한 건물이기도 했다.

윤심덕은 이 YMCA 강당을 주무대로 개성, 평양 등 전국을 돌며 ‘기근동정음악회’ ‘기근구제여류자선음악회’ 등 각종 공연 일정을 소화했다. 이화여고 배화여고 호수돈여고 등 미션스쿨 합창단이 코러스를 맡았다.

앞서 윤심덕은 음악학교 재학 중이던 1921년 7월 ‘재일 한국인 동우회 순회극단’과 함께 경남 마산(현 창원 일부) 공연을 필두로 근대극 전국 순회공연에 나섰다. 근대연극인 마해송 그리고 윤심덕의 ‘남사친’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 등과 같이했었다. 7월 말 마지막 공연지 경성에서의 공연이 끝나자 언론은 “윤심덕 양의 독창은 청중의 정신을 황홀케 하였다”고 보도했다. 그 칭찬 속에 독 기운이 있는 것을 그땐 결코 몰랐을 것이다.

YMCA 무대에 선 이후 언론은 ‘악단의 신성’ ‘일본에까지 명성이 자자한’ ‘성악가의 일류’ ‘여류음악계의 일류’ ‘신묘한 예술을 자랑’ ‘만인의 총애’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하지만 정작 내용은 섹슈얼리티에 집중했다. 윤심덕과 함께 주목받던 화가 나혜석은 그의 공연을 보고 ‘… 음악에 천재가 계신 것을 부러워하기 마지못했다’(‘개벽’ 1924년 7월호)고 했으나 남성들에겐 성적 판타지의 대상이었다. 인습을 뛰어넘고자 했던 신여성이 처한 현실이었다.

윤심덕의 전성기는 1923∼25년 종로중앙기독청년회관 중심의 활동 3년간이었다. 그는 이 기간 조선여자청년회 연희전문학교 평양기독청년회 종로중앙기독청년회 중앙엡윗청년회 등 기독기관 및 단체가 주최한 음악회에서 교회음악곡을 주로 불렀다. 그의 선곡은 ‘방긋 웃는 월계꽃’ ‘부활의 기쁨’ ‘푸른 갈릴리’ ‘자비하신 예수’ ‘평안이 쉬나’ ‘산타클로스’ 등의 찬송이었고 1926년 집중 취입한 레코드에도 이러한 곡이 들어갔다. 서양음악을 접한 이들 대개가 그리스도인이었기 때문이다. 일반 공연 무대에 서면 창가나 유행 잡가를 요구했다. 어느 음악회나 ‘윤심덕의 솔로’ 순서가 없으면 흥행이 이뤄지지 않았다. 한데도 정작 공연이 끝나면 ‘풍염한 교태에 끝없는 육성미’ ‘창가 아니면 유행 잡가 그렇지 않으면 예수교 찬송가 부스러기다’라고 비하했다.

무대에 서면 찬송가 주로 부르던 ‘자매’

윤심덕은 평양 남산현교회에 출석하는 부모를 뒀다. 어머니는 교회 전도부인 김세지(장씨로도 알려짐)였다. 1915년 4월 27일자 매일신보는 ‘유학 가는 여학생’ 기사에서 윤심덕에 대해 “부친이 풋나물 장사로 업을 삼고 모친은 평양 서문 안 광혜여병원 사무원이고 극빈함에도 삼숭여학교와 숭의여중에 입학했다”며 “금번 광혜여병원 의사 미국 사람 홀 부인이 5년간 수학할 학비를 담당하여 동경 청산학원에 입학케 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세상은 근대 여성 선각자에게 가혹했다. 무엇보다 ‘경성 이(李)모라는 부호 가정교사로 입주했을 때 그가 그의 소중한 것을 유린했다’는 기록에서 엿볼 수 있듯 성폭력이 정신적 몰락의 계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한데 언론은 오히려 이모씨에게 꼬리쳤다는 식의 보도를 했다. 윤심덕이 어린시절 영적으로 이끌었던 남산현교회 배형식 목사(독립운동가)에게 피난했을 때마저도 “애인이 있어서 따라갔다”는 식 보도로 2차 피해를 입혔다.

실종 직후 “세상 남자들은 모두 악마 같다. 언젠가 한 놈은 죽이고 죽는다”고 윤심덕이 남자친구에게 말했다는 기사를 보노라면 마치 잘 짜여진 스릴러 영화 각본을 읽는 것처럼 오싹하다.

근대 첫 소프라노 윤심덕은 ‘실종’됐다. 사랑에 의한 동반 자살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딱 여기까지다. 윤심덕은 세상의 관음을 피해 스스로 실종되어 구원의 길을 택한 것은 아니었을까.

미국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 윤심덕 의사 만들려고 했다

‘광혜여병원 의사 미국 사람 홀- 부인은 윤심덕이 5년간 수학할 학비를 담당하여 동경으로 보낸다고 그 부모의 고심함과 또 홀-부인의 자선심을 만구칭송하더라.(1929년 4월 매일신보)’

미국 의료선교사 로제타 홀(사진). 우리나라 첫 여성병원인 보구여관을 이끌었고 남편 윌리엄 홀과 평양에도 병원을 세워 조선 백성을 치료하고자 했던 인물. 윤심덕의 어머니는 로제타 홀이 세운 광혜여병원에서 병원 빨래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윤심덕은 부모와 함께 남산현교회에 다니는 총명한 교회 자매였다.

로제타 홀은 병원 뜰을 놀이터 삼아 자란 윤심덕에게 의학을 공부해 아픈 이웃을 도울 것을 권했다. 윤심덕은 의대 진학을 위해 미션스쿨 동경청산학원으로 진학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일어를 먼저 배우기로 하고 떠났다. 한데 적성에 맞지 않았다. 교회음악(서양음악)의 매력에 빠져 동경음악학교로 진학했다.

·1897년 평양 태생, 부모는 평양 남산현교회 교인
·1910∼1915년 숭의여중 평양여고보 경성여고보
·1915∼1918년 동경청산학원
·1919년 횡성·춘천공립보통학교 교사
·1919∼1922년 동경음악학교
·1923∼1925년 성악가 활동
·1925년 일동레코드사와 전속계약
·1926년 2월 토월회 가입 연극 출연
·1926년 8월 3일 실종

글·사진=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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