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다시 불러보는 그 이름,  나혜석 기사의 사진
조덕현 ‘프렐류드’(전주곡). 캔버스, 장지에 연필.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
이 그림은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9폭으로 이뤄진 작품 중앙에 한 여성의 시신이 보인다. 흰 광목으로 사체를 덮었지만 맨발이 삐죽 드러나 있다. 신발도 못 신은 채 처참한 최후를 맞은 이는 나혜석(1896∼1948)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인, 여성운동가로 시대를 풍미했던 나혜석의 생애를 흑백의 서사극처럼 그려낸 작가는 조덕현(61·이화여대 교수)이다.

조덕현은 한국 근현대사 속 ‘신여성’의 상징이었던 나혜석의 비극적 죽음을 출발점에 놓고, 그의 빛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부챗살처럼 펼쳐놓았다. 서사의 통상적 기법을 뒤집는, 역순의 스토리텔링이다. 가로 5.8m, 세로 3.5m의 거대한 화면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장면들은 나혜석이 남긴 삶의 기록에 화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탄생했다. 첫사랑, 결혼, 독립운동 등 생의 순간들을 조덕현은 9개 화면으로 구성한 뒤 하나로 집약시켰다. 각 장면들은 서로 조우하며 한 인간의 생애를 교향악처럼 들려준다. 놀랍고 탄탄한 플롯(구성)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사진처럼 극사실적인 화면을 오직 연필로 완성했다는 점이다. 데뷔 이래 서사를 축으로 회화와 사진,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었던 그에게 세밀한 연필화는 존재이유다. 역사를, 생을, 그리고 인간의 혼을 누구보다 촉촉하고 매혹적으로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은 ‘연필작업 30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화폭 속 인물들이 살아 숨쉬는 이 대작은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의 봄 기획전 ‘금하는 것을 금하라’에 출품됐다. 조덕현 외에 박영숙 윤정미 정은영 등이 신여성 나혜석과 이 시대 여성의 실존적 상황을 담아낸 작품을 관객에게 선보이고 있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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