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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의 음식이야기] 대항해와 대구

[홍익희의 음식이야기] 대항해와 대구 기사의 사진
얼음에 저장된 대구
스페인 동북부 바스크 지역에서는 고대로부터 햇볕에 말린 마른대구와 소금에 절인 절임대구가 개발됐다. 대서양 대구는 보통 1m가 넘는 대형 고기로 특히 입이 커서 대구(大口)라 불린다. 이후 대구가 포르투갈과 북해로 퍼져나가 유명한 바칼라우(Bacalhau·대구) 요리가 탄생했다. 바스크족들은 대구를 잡기 위해 콜럼버스 이전에 이미 신대륙의 포틀랜드까지 진출해 대구를 잡았다는 설이 있다. 그들은 염장 대구를 만들기 위해 해안에서 천일염을 만든 것으로도 유명했다. 바스크족이 염장 대구를 유통시킴으로써 유럽 내륙에 사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물고기를 맛볼 수 있게 해주었다. 콜럼버스가 대항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절임대구와 하몽이 있어 가능했다. 그래서 대구를 흔히 ‘세계사를 바꾼 물고기’라 부른다.

미국에 이민 간 초기 유대인들 일부는 매사추세츠 근처 케이프 코드(Cape Cod Bay)에서 대구 잡이를 했다. ‘코드(Cod)’라는 단어 자체가 생선 대구를 뜻한다. 그 앞바다는 대구 산란철이 되면 말 그대로 ‘물 반, 대구 반’으로 세계 4대 어장의 하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소금 절임대구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먹거리였다. 특히 1년의 4분의 1에 달하는 금육일에는 육류 대신 생선을 먹었다. 1776년 대구 무역의 중심 항구 뉴포트의 유대인은 1200명으로 항구 전체 인구의 20%에 이르렀다. 영국 왕이 식민지의 가장 중요한 교역상품인 당밀과 차에 세금을 매기고 대구 무역을 제한하는 법까지 만들자 화가 난 식민지 사람들이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점차 고기 잡는 기술이 발달해 1㎞ 반이나 되는 긴 낚싯줄에 1000여개의 낚싯바늘을 매단 주낙으로 엄청나게 많은 대구를 잡았다. 바닷속 대구의 수가 줄어들자, 아이슬란드와 영국은 아이슬란드 해의 대구 어업권을 둘러싸고 세 번에 걸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대구 전쟁’이 끝난 1975년에 아이슬란드는 해안으로부터 200해리(370㎞) 내에서는 자기 나라 어선만 어업을 할 수 있다고 선포했다. ‘배타적 경제수역’이 탄생한 배경이다.

홍익희(세종대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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