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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⑨ 공주기독교박물관

복음과 독립운동으로 민족 깨운 충청지역 기독교 역사 오롯이…

[오기완과 떠나는 성지순례 ‘한국의 산티아고 길’ 680㎞를 걷다] ⑨ 공주기독교박물관 기사의 사진
충남 공주 제민1길 공주제일감리교회 ‘문화재 예배당’ 내부에는 지역 복음화와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교회 역사가 전시돼 있다. 공주=강민석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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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외국인선교사묘역이 있는 영명중·고등학교를 나와 숙소인 공주 한옥마을로 향했다. 햇볕이 잘 드는 아늑한 터에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한옥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이곳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옥을 체험할 수 있도록 숙박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배낭을 메고 6∼8시간을 걸었더니 허리 통증이 심했다. 허리에 피로가 누적되다 보니 가벼운 물건도 돌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온천을 찾았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독립운동 선봉, 공주 최초 감리교회

공주시 제민1길 공주제일감리교회에 도착했다. 교회는 수원 이남 지역에 설립된 최초 감리교회다. 왼편엔 현대식 교회 건물이, 오른쪽엔 과거 예배당으로 사용하던 ‘문화재 예배당’이 눈에 띄었다.

교회 입구에는 1916년 공주제일감리교회에 부임했던 8대 담임목사인 신홍식 목사(1871∼1939)의 동상이 있다. 충북 청주 출신인 신 목사는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이다. 목회자 중에선 처음으로 민족대표에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인물이다.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자 그는 법정에서 일제가 내세운 동양평화론의 허구성을 질타했다고 한다. 그는 충청 지역 많은 교인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어 민족복음화와 독립운동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공주는 1932년 충남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충청도의 정치 경제 교통의 중심지였다. 자연스럽게 충청도 복음화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1892년 미국 감리회는 서울 이남 지역을 수원·공주 구역으로 정하고 공주를 충청도의 선교거점으로 삼았다.

선교사들은 공주를 중심으로 충청권을 동서남북 지방으로 구분했다. 스크랜턴 선교사는 공주 지역에 선교적 관심을 쏟았다. 수원·공주 구역 관리자였던 스웨러 선교사는 1902년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해 초가집에서 전도 모임을 가졌다. 이것이 바로 남부 최초의 감리교회인 공주제일감리교회가 됐다.

교육·의료 봉사 활동 주도

1903년 원산에서 활동하던 의료선교사 윌리엄 맥길 선교사가 공주로 내려왔다. 배재학당 출신 이용주가 그와 동행했다. 맥길 선교사는 영명동산 서쪽에 터를 잡고 초가집에 진료실과 예배실을 마련했다.

1905년 맥길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휴가차 미국에 돌아갔다가 개인 사정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에 로버트 아서 샤프(1872∼1906) 선교사가 그 뒤를 이어 교회를 중심으로 한 충청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교회는 교육과 의료사업을 벌였다. 영명학원과 영아관(유치원)을 운영하며 인재양성과 사회봉사 활동을 주도했다.

문화재 예배당은 1931년 11월 건립됐다. 고딕양식의 붉은 벽돌구조가 인상적이었는데, 한국전쟁을 거치며 상당부분 파손됐다. 교회는 파괴된 건물을 1956년과 1979년 두 차례 개축해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다. 벽체와 굴뚝 등은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2011년 교회건축사적으로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472호에 지정됐다.

영성과 역사 담은 기독교박물관

문화재 예배당은 현재 공주기독교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80년 넘게 신앙의 선배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던 예배당은 마룻바닥으로 돼 있다. 안에 들어서니 1979년 설치된 강단 전면의 스테인드글라스가 눈에 띄었다. 고 이남규 선생의 작품으로 개신교 예배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 선생은 프랑스 유학 후 달드베르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다고 한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정면에서 봤을 때 왼쪽 부분은 성령을 뜻한다. 비둘기와 빨간 성령의 불로 상징화했다. 가운데는 성자다. 종려나무와 십자가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했다. 오른쪽은 성부다. 창조주 하나님을 빛으로 상징화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따사로운 햇살이 예배당 안으로 살포시 들어왔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은총이 마음속으로 잔잔하게 들어오는 감동이 있었다.

예배당 안에는 오르간이 있다. 오르간은 1905년 샤프 선교사가 공주에 올 때 가져온 것인데, 아내인 사애리시 선교사와 예배 때마다 사용했다고 한다. 110여년 전 나라 잃은 슬픔에도 오르간을 치며 하나님을 찬양한 샤프 선교사 부부와 조선 백성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곳은 이상화 박목월 선생이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유관순 활동했던 독립운동의 산실

지하로 내려가니 다양한 사진과 서류, 책자, 예배자료를 볼 수 있었다. 1930년대 사용하던 교회 금전출납부와 연혁, 50년대 학습교인 명부 등을 보니 교회 행정을 맡았던 신앙선배들의 꼼꼼함이 느껴졌다.

벽면에는 유관순 열사와 제9대 현석칠(1880∼1943) 담임목사의 부조상이 보였다. 유관순은 1919년 3·1운동 여파로 학교에 휴교령이 내려지자 만세시위를 지휘하기 위해 공주로 내려와 공주제일감리교회 내 영명학교에서 태극기를 인쇄했다.

그의 오빠 유준석(본명 유우석)도 1919년 공주 읍내장 만세시위 때 독립선언서를 제작했다. 아우내장터 만세시위로 유관순의 부모는 일제에 의해 살해됐고 준석은 공주 감옥에, 관순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갇히게 됐다. 어린 두 남매를 돌볼 사람이 없게 되자 도움의 손길을 내민 곳이 공주제일감리교회다.

이후 영명학교 처녀교사였던 조화벽이 두 남매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돌봤고 이것이 인연이 돼 훗날 유준석과 조화벽은 부부가 됐다. 현석칠 목사는 1919년 3월 한성임시정부수립 운동에 기독교 대표로 참가했다. 그해 4월 공주읍 장날을 이용해 교인들을 이끌며 대대적인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한국 근현대사 품은 문화재 예배당

공주제일감리교회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계몽과 의료,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다가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 폭격을 맞아 건물이 붕괴됐지만 두 차례 개축을 통해 지역사회에 예수 복음을 전하고 지금은 기독교 역사를 알리고 있다. 현재 교회는 윤애근 목사가 담임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사조가 창궐하면서 왜곡된 인권혐오 차별증오 등이 판치고 있다. 반면 기독교의 절대가치, 역사적 순수성은 조롱받고 있다. 한국교회는 자랑스러운 정신적 유산을 토대로 진리를 당당하게 변증해야 할 사명을 안고 있다. 이제는 민족 복음화와 세계선교에 앞장서는 한국교회의 위상을 후대와 한국사회에 적극 알려나가야 할 때다. 역사에 동참하는 민족적 기독교인을 길러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끓어올랐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사진=강민석 선임기자
그래픽=이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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