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늙은 장로의 노래 기사의 사진
경북 성주에서 평생 수박·참외 농사를 지으며 사신 김재덕 장로란 어른이 계십니다. 1933년생입니다. 성주 낙동강변 도흥교회를 세 살 때 누나 등에 업혀 나가기 시작한 분입니다. 지금은 기력이 쇠했습니다. 그가 고향 성주를 벗어난 건 1953년 군입대해 공비 토벌하러 다니던 때뿐입니다. 제주도에서 훈련받고 지리산과 내장산 일대 잔비 소탕에 투입됐습니다. 그 공로로 국가유공자가 됐습니다.

4년4개월의 군복무를 마친 그는 성주로 돌아와 수박농사를 시작했습니다. 6·25전쟁 발발 이태 전 어머니를 여의었고, 이듬해 결혼을 했었지요. 결혼 10년 만에 첫 딸을 얻었고 이어 줄줄이 사남을 두었습니다. 그가 어린 시절, 집 인근에는 학교가 없었습니다. 간이학교가 윗마을에 있었는데 그땐 학교 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내는 학교도 모했어. 한학하고 교회 야학 좀 배앗고…, 그땐 신사참배(안 한다고) 장로님들이 붙들리 가 가지고 며칠씩 감금되고 이래 했어요.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 주로 (교회에) 많았고….”

일제 강점기 교회는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마을 서낭당을 뒤집어 버리기도 했답니다. 또 교회가 들어서고 반목하던 동네 여러 성(姓) 씨들이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는 최소한 먹을거리도 안 남겨두고 식량 등을 공출로 빼앗았습니다. 교회 종도 빼앗겼고요. 소나무 속껍질 벗겨 춘궁기를 넘기곤 했죠. 물레 돌릴 때는 물레에 기름칠해 소리 안 나게 해야 빼앗기지 않고 옷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주로 보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기도와 성경 읽기만으로 물리가 틔었죠. “군대 갔다 와 가지고 교회 더 열심히 댕깃어. 부친이 반대를 마이 했지. 내(늘) 술자시고 오마 마 내 교회 간다고 뭐라카고 캤어요. 배움이 늘어 교회에서 매일 아이들 모다놓고 국문 가르쳤어.”

전쟁 후. 교회 장로들이 중심이 돼 교육은 물론 수리시설 만들어 마을 소득 증대에 힘썼습니다. 삽 하나 의지해 순 노동으로 논을 일궜습니다. 그럼에도 “1년 중 원껏 한 번 쌀밥 제대로 먹어본 적 없어. 원조 식량 들어오고, 구제품을 교회가 나눠주면서 조금 숨통이 트였지.”

새마을운동이 시작되고 낙동강 물을 끌어다 농사를 지으면서 춘궁기를 면했습니다. 현대적 수리시설로 개선되면서 낙동강 모래가 날려 서걱이던 논농사가 훨씬 수월해졌고 생산성도 높아졌습니다. 평생 고된 노동으로 살아가던 농민들이 여가나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교회가 주일 야외 예배 보는 날 이웃 교회와 연합해 레크리에이션이란 걸 했지요. “그때 낙동강변에 포플러나무들이 참 좋았어. 지금은 다 베어져서 그렇지. 강변 금모래사장에서 달리기, 씨름, 배구 등을 교회 식구들과 했어. 넉넉한 강이었지. 눈에 선해.”

김 장로는 무엇보다 30대 때 성경 구락부를 조직해 교회가 학교를 대신한 것을 제일 기쁨으로 생각하십니다. 그 구락부 활동을 통해 마을공동체 사람들이 깨우쳐 갈 때 은사가 단비와 같이 내리더랍니다. 그래서인지 4H클럽 지도자상 수상보다 성경 구락부 경북지부 모범지도자 표창장 수상을 더 값지게 여깁니다.

그렇게 ‘오직 예수 빽’ 하나 믿고 살아온 그는 1983년 장로 피택이 됐고 2003년 은퇴를 했습니다. 자식들이 은퇴하던 해 금혼식을 열어줬지요. 그때서야 처음으로 결혼사진이라는 걸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평생을 살아온 고향 성주. 낙동강은 4대강 개발로 뒤집어졌고, 사드 배치 문제로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그렇지만 김 장로는 한국교회가 생명을 살리는 지혜의 성소가 돼줄 것을 바라며 기력을 다해 기도를 합니다.

“요즘 한국교회가 큰 구실을 못한다고 해쌓지. 옛날에는 교회 다니던 분들 많이 성실한 택이지. 술 안 먹고 담배 안 피우고 이래 하이끼네… 지금은 달라져 세속화되어 가지고 뭐 교인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어. 교회 안 댕기는 사람보다 모범이 돼야 하고 관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지금은 뭐시 마이 없어졌어.”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국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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