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홍 칼럼] 북핵, 춘래불사춘 기사의 사진
김정은의 최대 관심사는 김씨 세습왕조를 대대손손 이어가는 것
‘단계적 동시 조치’도 체제 유지를 위한 전략
정부, 한·미 공조 유지하며 비핵화 의지 다잡아야

북한 김일성이 살아 있던 1992년이었다. 북한은 우여곡절 끝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수용했고, 사찰 과정에서 플루토늄양을 속인 것으로 밝혀져 큰 파장이 일었다. 북한은 사실이 아니라며 IAEA 사찰을 거부했고, 이듬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에 미국은 북핵 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을 꾀했다. 긴장이 고조될 즈음 김일성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회담을 통해 돌파구가 마련됐고, 94년 제네바합의로 막을 내렸다. 이른바 1차 북핵 위기다.

플루토늄양 논란에서 북한이 IAEA 사찰을 받기 이전부터 핵 개발을 추진해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80년대 중반부터 시작했다는 게 정설이다. 김일성에 이어 그의 아들 김정일 역시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결국 그의 손자 김정은이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3대에 걸쳐 무려 30년이 넘는 세월을 핵무기 보유에 썼다. 핵무기 외에 김씨 왕조를 지킬 방도가 없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그런 김정은이 요즘 ‘한반도 비핵화는 선대의 유훈’이라는 말을 하고 다닌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깜짝 정상회담에서, 문재인정부 대북특사단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말을 했다. 일각에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가 분명하다”는 평가가 나오는 근거다. 하지만 핵무기에 집착해 온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유훈이 비핵화라는 게 말이 되나. 또 수십년 공을 들여 완성단계에 도달한 핵을 김정은이 포기할 수 있을까.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선대의 유훈’은 김정일도 자주 입에 담았었다. 김정은 발언이 새로운 게 아니라 미국의 핵우산 철폐, 평화협정 체결 등 독재체제 안정을 최우선시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입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김정은의 ‘단계적 동시 조치’ 발언도 같은 맥락이다. 한마디로 핵무기를 일거에 없애지 않겠다는 뜻이다. 달리 표현하면 북한의 비핵화 과정을 여러 단계로 나눈 뒤 단계마다 한국과 미국이 김씨 세습체제 유지 및 안정을 위해 보상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북한이 애용해 온 ‘살라미 전술’이다. 이대로라면 북핵 폐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수밖에 없다.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고, 실제로 북핵이 폐기될지도 미지수다. 북한의 ‘먹튀’로 끝난 과거의 핵 협상 결과가 재연될 소지마저 있다.

반면 미국은 북한이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를 위한 의미 있는 조치를 먼저 취해야만 보상할 수 있으며, 그 이전에 줄 ‘당근’은 없다는 자세다. 접점 찾기가 매우 힘든 국면이다. 게다가 중국이 북한 입장에 동조하고 나서 더욱 꼬여버렸다. 중국을 우군으로 얻은 김정은의 대미 협상력은 커졌다. 김정은은 내친김에 러시아도 우군으로 끌어들일 태세다.

대북 압박 대열을 흐트러뜨리려는 김정은의 전략은 4·27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이어질 것이다. 문 대통령을 상대로 단계적 동시 조치의 불가피성을 강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벌써부터 청와대 기류가 바뀌고 있다. 핵 동결→핵 폐기라는 2단계를 큰 틀로 하되, 협상이 무르익으면 항구적인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을 단번에 타결하는 방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북·중 정상회담 이후 단계적 해결로 가야 한다는 견해가 많아지고 있다. 미국이 간접적으로 경고할 정도다. 이러다 북·중·러 대 한·미·일 구도가 아니라 남·북·중·러 대 미·일 구도가 만들어지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김정은이 ‘동굴’ 밖으로 나온 건 강력한 대북제재 탓이다. 그가 핵 무력을 완성했을지 몰라도, 경제는 엉망이다. 상당수 주민들이 조만간 보릿고개를 힘들게 넘겨야 할 처지다. 올겨울이 되면 식량난은 가중될 것이다. 전기도, 석유도 턱없이 부족하다. 주민들의 불만 수위가 점점 높아지면 그의 위상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대북제재를 경감하는 건 물론이고 한국과 미국의 경제적 도움이 절실한 상태인 셈이다. 그렇다고 갑자기 북한 주민들의 배를 불릴 생각도 없을 것이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고 주민들이 여유를 갖게 되면 체제 위협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핵 폐기 카드를 흔들며 시간을 갖고 북한 내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수준에서 하나하나 대가를 챙기려 할 공산이 크다. 김정은 본인은 물론 대대손손 김씨 왕조를 이어가는 게 그의 최대 관심사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향후 판세가 김정은 의도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핵을 쥐고 있는 데다 중국이라는 든든한 바람막이가 생겼고, 우리 정부까지 흔들리고 있는 탓이다. 봄이 왔지만 북핵에 관한 한 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김진홍 편집인 j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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