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원준 칼럼] 스트롱맨 외교 기사의 사진
외교가 의전을 갖추고 우아한 건 그 본질인 ‘나의 이익 챙기기’라는 치졸함을 포장하기 위한 것 아닌가
김정은이 키우는 이번 판은 냉전 이후 가장 노골적인 거래의 場… 거간 잘 하려면 원칙 못지 않게 상상력 중요


외교는 뭐랄까, 좀 고상해 보였다. 까다로운 의전(儀典)을 챙겨가며 사절을 맞이하고 그 사람에게 격을 맞춰준다. 말끔한 정장에 넥타이를 맨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악수를 하는데 하나같이 미소를 띠고 있다. 그들이 마이크를 쥐면 나오는 말은 대개 두루뭉수리해서 귀에 찔리는 게 별로 없다. 하나마나한 듯해 곱씹게 만들지만 이리저리 해석할 여지를 열어두곤 한다. 각국 정상이 나서면 외교의 품격은 한층 높아지게 마련이다. 지난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최고의 예(禮)에 파격을 더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환대했다.

외교가 이렇게 우아한 모습을 갖게 된 건 그 내용이 너무 치졸하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됐다. 우리에게 보이는 외교와 그들이 마주앉아 하는 외교는 전혀 딴판인 게 분명하다. 적나라하게 드러내자니 견딜 수 없이 창피해서 복잡한 절차와 격식을 만들어 포장했구나 싶다. 품격에 가려진 본질은 ‘나의 이익’을 챙기는 것일 테다. 트럼프는 2일 시리아에서 손을 떼겠다며 “7조 달러를 썼는데 그 대가로 받은 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별로 창피함을 느끼지 않는 이 독특한 대통령은 몇 명이나 죽었는지 셀 수 없는 비극적 사태에서도 대가를 계산하는 것이 국제무대의 생리임을 알려줬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외교 역시 차츰 본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트럼프와 김정은의 게임인 것 같더니 시진핑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까지 내로라하는 스트롱맨이 다 달려들었다. 스트롱맨이란 말은 어떻게 나왔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지금 정의한다면 ‘내 이익 앞에선 물불 안 가리는 사람’ 정도가 적당하겠다. 그들의 외교는 지금까지 우리가 봐온 것과 사뭇 다르다. 어제 한 말 때문에 오늘의 행동을 망설이는 법이 없다. 나의 변신은 무죄라고 웅변하듯 급변침을 거듭한다. 최근 벌어진 몇 가지 장면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미 자유무역협정 개정 합의를 “위대한 동맹과의 위대한 협상”이라고 치켜세웠다. 불과 며칠 뒤 그 위대한 협상의 서명을 “북한과의 협상이 타결된 이후로 미룰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안보는 동맹이고 무역은 경쟁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텐데 안보와 무역을 연계하겠다고 나섰다. 동맹이란 말을 외교적 수사(修辭)쯤으로 격하시키는 발상이 지금 한반도 외교 테이블에 올라와 있다. 이 스트롱맨에게 이익은 동맹보다 우선한다. 북한과의 협상에서도 손해다 싶은 일은 결코 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이 판에서는 무엇을 챙겨야 하나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지 않을까.

시진핑 주석의 특사로 한국을 찾은 양제츠 중국 정치국 위원은 선물을 가져왔다. 단체관광 등 사드 보복 조치와 관련해 “빠른 시일 안에 가시적 성과를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께서 이를 믿어주시기 바란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 문제는 지난해 한·중 정상회담에서 이미 합의에 이른 것이었다. “믿어 달라”에는 정상 간 합의를 그동안 이행하지 않았다는 시인이 담겨 있다. 중국이 갑자기 이러는 건 어렵사리 한반도 운전대를 잡은 한국에서 얻어낼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양 위원은 북·중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고 북·미 회담 합의 과정의 미국 입장을 탐문하며 이 판에 숟가락을 얹었다.

아베 총리는 일본인 납북자 문제가 미해결 상태임을 속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있을 것 같다. 가장 마지막까지 대화가 아닌 압박을 해야 한다고 외쳤던 터라 북핵 외교무대에서 완전히 소외될 뻔했다. 180도 입장을 바꿔 대화에 끼어들며 늘 그랬듯 납북자를 명분으로 삼았다. 곧 미국에 달려가 트럼프를 만날 예정이고 북·일 정상회담도 추진하고 있다.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이러는 걸까? 협상 테이블에서 이익 균형을 맞출 때 물 먹지 않기 위해서다.

4월에 남북, 5월에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그 사이 한·미 정상이 만날 수 있다. 한·중·일 회담도 추진될 테고, 남·북·미 정상의 극적 회동도 가능하다. 중국에서 남·북·미·중 회담을 원한다는 말까지 들린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은 계속 판을 키우고 있다. 아마 냉전체제 이후 가장 노골적인 ‘거래의 장’이 될 것이다. 이 무대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하며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정부가 설정한 목표는 포괄적 비핵화 선언과 그 로드맵을 끌어내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시나리오를 그렸든 그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20여년간 풀지 못한 과제인 데다 이해당사국마다 다루기 힘든 지도자가 앉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하나, 뭔가 이익을 챙기려 거래에 나섰다는 점이다. 스트롱맨 사이에서 거간을 하려면 원칙 못지않게 상상력이 중요하다. 흥정의 돌파구는 본질과 좀 떨어진 곳에 숨어 있을 때가 많다.

태원준 온라인뉴스부장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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