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수의 감성노트] 사춘기 자녀와 대화하기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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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언제나 어렵다. 상대의 기분을 살펴가며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를 순간순간 판단해야 하니, 대화는 꼬부랑 고갯길을 자동차로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말 저말 쉽게 내뱉으면 대화는 끊어지고 사고 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 누구와 대화하느냐에 따라 그 까다로움의 정도가 달라지는데, 뭐니 뭐니 해도 제일 버거운 대화 상대는 사춘기 청소년 자녀일 거다. 말 펀치의 강도로 치면 자식이 헤비급, 부모가 라이트급일 때가 많다. 정신과 의사인 나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버릇없이 구는 것 같아 따끔하게 야단쳐야겠다 싶다가도 ‘하루 종일 얼마나 공부에 시달렸기에 저렇게 예민해졌겠나’ 싶어 그냥 참고 넘어갈 때가 대부분이다. 잠도 푹 자고, 자기가 좋아하는 책도 읽고 나면 딸은 기분이 좋아져서 “아빠 그런데 말이지…”하며 유쾌하게 재잘대니까. 이럴 때 보면 사춘기가 무서운 게 아니라 공부에 지쳐서 자기도 모르게 짜증 부리는 것이구나 싶어 안쓰러워진다. 어른도 일에 시달리면 날카롭게 변하기 마련인데 공부에 짓눌린 청소년은 오죽하랴. 따지고 보면 중학교 2학년이 세상에서 제일 무섭다는 말이 나온 것도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공부의 틀 안으로 이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아이들을 밀어 넣기 때문일 게다.

공부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우울한 자녀를 어떤 말로 위로해주면 좋을까? 공부가 힘들다는 딸에게 “그깟 공부 중요하지 않아”라고 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그렇지 않을 거다. 공부 욕심이 있는 자녀라면 더 잘하고 싶은 자기 마음을 부모가 몰라준다며 서운하게 여길 거다. 반대로 “힘들어도 더 열심히 해봐. 넌 잘할 수 있어”라고 하면 이걸 응원으로 받아들일까? 긍정적인 마음을 불어넣으려고 한 말이 오히려 마음을 무겁게 만들 공산이 크다. 그렇지 않아도 지치고 힘든데 더 잘하라고 하니 자녀 입장에서는 큰 압박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공부에 지친 자녀를 위로할 때 다음 순서를 지키면 좋겠다.

스트레스 받고 우울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길 원한다. 그러니 대화의 출발은 상대의 솔직한 감정을 언어로 적확하게 표현해주는 것이다. 이건 상담할 때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언어로 대신 묘사해주는 것 자체가 치료적이다. 상대가 그 감정을 가진 이유와 결과를 판단하거나 유추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읽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위로하기 위해 했던 말이 오히려 부담을 주거나 상처가 되는 것도, 이 첫 번째 단계 없이 곧바로 “힘내라, 별것 아니야, 넌 할 수 있어”라며 해결책을 성급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기를 바란다. 왜 그렇게 느끼는지,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에 대한 분석은 그다음에 원한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조언을 급하게 원하지 않는다. 원하더라도 인정의 단계를 지나서 나중에 듣고 싶어 한다.

“그래, 네가 공부하느라 많이 힘들구나”가 첫 번째로 듣고 싶어 하는 말이다. 다음이 “네가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조금 더 자세하게 말 해 줄래”가 다음으로 해야 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아빠 생각에는 이렇게 해보면 좋을 것 같아”라고 조언해볼 수 있다. 자녀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가장 마지막 단계다. “학창 시절에 공부하느라 괴로워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고통이 너를 성장시켰다는 걸 깨닫게 될 거야”라는 의미 부여는 가장 마지막에 해야 한다. 이런 말부터 먼저 꺼내면 꼰대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위로하려고 해도 잘되지 않을 때도 있다. 이건 대화의 순서나 표현이 서툴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겉으로 드러난 말과 마음속 진심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나는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지도 않아요. 좋은 대학 가야 한다고 압박하지도 않아요”라고 해놓고 본심은 ‘자식이 공부를 더 잘했으면 좋겠다. 명문 대학에 꼭 진학해야 한다’라면 그 어떤 말로 포장해도 그 바람이 자녀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나도 딸에게 “공부 잘하는 것보다 네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그걸 했으면 좋겠어”라고 녹음기 틀어놓은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딸이 좋은 성적 받아왔을 때 내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공부 욕심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럴 때는 부모부터 자기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봐야 한다. ‘혹시 내 욕심이 아이와의 대화를 가로막고 있는 건 아닌가?’하고 말이다.

김병수 정신과 전문의

삽화=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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