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재열] 사회적 가치는 공유정부로부터 기사의 사진
강력한 발전국가의 유산을 상속받은 일사불란하고 위계적인 ‘중앙집권 국가’. 한국 정부를 보는 외국 학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정부 기관과 접할수록 필자 눈에는 부서와 부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관료집단 간 경합의 장, 즉 ‘네트워크 국가’로 읽힌다. 헌법개정안에 담았다는 ‘분권’의 정당성은 중앙집권 국가 이미지를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부처 이기주의가 극대화된 네트워크 국가가 현실이라면 더 절실한 것은 ‘공유’와 ‘조정’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의원 시절 ‘사회적 가치 기본법’을 발의했었고, 지금도 수정발의된 법안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그동안 공공기관의 효율과 이윤을 지나치게 강조한 이전 정권의 정책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가치의 내용으로 제시한 국민 안전, 건강, 일자리, 포용, 인권, 약자 보호, 상생, 지역 활성화, 시민 참여, 기업윤리, 공공성, 환경적 지속 가능성 등은 공공기관이라면 당연히 추구해야 할 가치들이어서 굳이 별도의 법이 필요한지 의문이다. 공무원들도 구체적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회적 가치 법안이 추구하는 목표를 공공기관이 얼마나 달성했는지에 대한 평가 기준을 만들기 전에 먼저 정부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가치의 핵심은 공유다. 정부는 정보와 데이터, 그리고 정책과 예산을 공유하는 플랫폼이다. 그러나 민간과의 공유는 차치하더라도 공공기관 간 공유는 여전히 문제다.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때 부처별 재난정보 통신망이 전혀 공유되지 않아 피해를 키웠다. 그러나 11년 후 발생한 세월호 참사에서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통계 공유의 실패도 심각하다. 참여정부의 성과라는 통계청 ‘e-나라지표’에 들어가 보면 부처마다 제공한, 자신들의 정책 투입을 자랑하는 통계들로 가득하다. 지방자치단체마다 주민 대상으로 대대적인 조사를 거쳐 사회지표를 만들지만 형식과 내용은 제각각이다. 정작 정책 수요자인 국민 눈높이에 맞는 일관된 통계는 빈약하다. 국민 삶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강력한 통계 자원 공유와 범정부적 조정이 필요하다.

국가의 장기 미래를 설계하는데도 국책연구기관 간 공유와 조정이 핵심이지만 소관 부처의 눈치를 봐야 하는 연구기관 간 조율은 쉽지 않다. 그러니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국가 미래 전략이 나오지 않는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산하 26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에서 매년 수백억원을 들여 패널 데이터를 모으지만 영유아, 학생, 청소년, 노동 청장년, 노년별로 자료가 따로따로다. 사람의 생애는 연속적인데 생애사 데이터는 기관별로 단절돼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토대연구 지원도 마찬가지다. 가능한 한 많은 연구자가 각자의 데이터를 모으도록 예산을 쪼개다 보니 공유재인 장기종합조사는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다. 이런 풍토에서 100여개국이 참여해 학술 공공재로의 가치를 극대화한 ‘세계가치관조사’나 지난 60년간 매년 축적해 온 미국의 ‘일반사회조사’, 혹은 일본 학계와 정부가 총력을 기울여 지난 50년간 모은 ‘계층이동조사’ 같은 토대 자료는 넘볼 수 없다. 그러니 한국적 사회과학이나 제대로 된 정책 연구도 기대난망이다. 1000명 규모 설문조사의 경우 수백만원짜리 자동응답 전화 조사로 모은 자료는 아무리 많이 쌓아봐야 학술 가치는 전혀 없다. 표본 대체율이 거의 100%에 달하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표집으로 자료를 모으면 비용이 수십 배 들겠지만 활용도는 수백 배 높아진다.

사드 배치 문제로 호되게 중국에 당한 뒤 문재인정부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아세안과 인도 등으로 확장하는 신(新)남방정책을 추진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시아 각국에 대한 종합 정보를 축적하고 발산하는 싱가포르대 아시아연구소나 일본 무역진흥기구 아시아경제연구소 같은 안정된 공유 인프라는 없고 고만고만한 개별 지역 연구소들만 즐비하다. 군(郡)마다 첨단산업단지를 만든다고 첨단산업이 발전할까. 지방마다 연구기관을 나누어준다고 연구·개발(R&D) 효과가 커질까.

정권이 바뀌면 임기가 보장된 정부 산하 기관장들을 일제히 낙하산 인사로 갈아치우는 관행은 문재인정부에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 시대 사회적 가치는 공유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서 출발한다. 공공기관일수록 제대로 된 인프라를 깔고 필요한 자원은 집중해 공유를 촉진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권에 줄 선 추종자들에게 ‘분권’과 ‘균형’을 명분으로 공적 자원을 분할 약탈할 합법적 기회를 제공하는 데 그쳤다는 오래된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 교수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