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조민영] 신뢰 잃은 정부와 자존감 기사의 사진
지난 정권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국정농단이라는 죄명으로 전에 없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무너졌다. 촛불혁명이라는 시민의 힘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들어선 새 정권이 받는 신뢰와 기대는 당연히 컸다. 현재 60%를 넘는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보여주듯 그 신뢰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받는 신뢰와 달리 행정부의 손, 발 격인 각 부처 공무원들의 분위기는 너나 할 것 없이 침울하다. 정권 출범 1년이 다 돼 가는데 아직도 청와대만 보인다는 비아냥을 극복할 의지나 힘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정부에 이어 박근혜정부까지 약 10년을 이어온 정권이 교체되면서 대대적으로 인적 물갈이가 이뤄진 것은 행정부 침체의 1차적 이유일 수 있다. 거기에 각 부처의 적폐를 없애고 고치겠다며 들어선 부처 개혁위원회 등의 활동이 주는 위축감이나 무력감은 더욱 클 것이다. 외부 민간인들로 꾸려진 개혁위의 활동 자체가 각 부처가 신뢰를 잃은 존재라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겠나” “하라는 대로 해야죠” 식의 자조적인 목소리가 특정 부처를 떠나 곳곳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행정부의 자존심은 무너질 대로 무너졌다.

문제는 자존심에 상처 입었다고 각 조직이 존재 가치와 책임감을 피하려 하는 듯한 모습이다. 교육부는 11일 2022학년도 대학 입시 개편안을 발표한다더니 국가교육회의에 최종 결정을 넘겼다. 갈등 사안을 국민들이 참여하는 숙의 과정을 거쳐 풀어내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2015년 9월 처음 수능 개편을 논의하겠다고 밝힌 지 932일이 지났다는 점, 수능에 대비해야 하는 학생들에게는 남은 시간이 많지 않고 교육부가 숱한 여론 수렴 과정을 거쳤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교육부의 결정은 ‘미루기’로 비지는 측면이 크다. 박근혜정부 역사교과서 등 과거 정책 주무부처로 적폐청산 대상으로 지목된 교육부가 이번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교육부만이 아니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삼성의 삼성서비스노조 와해 공작 사건 재수사가 이뤄지면서 궁지에 몰렸다. 애초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제기됐던 진정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져서다. 자체 진상조사가 필요할 법한 상황인데 정작 고용부의 움직임은 아직 미미하다. 지난 정부 적폐를 조사 중인 고용노동개혁위가 할 일이라는 이유에서다.

서지현 검사의 ‘미투(MeToo)’를 계기로 검찰 조직 내 성추행 피해 등을 조사하는 검찰 성추행 조사단은 서 검사를 성추행하고 인사 상 불이익을 준 혐의를 받는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검사장)의 신병처리 문제를 13일 수사심의위원회를 통해 결정키로 했다. 수사심의위는 지난 1월 변호사, 교수, 기자, 시민단체 활동가 등 외부위원 200여명으로 출범한 민간위원회다. 검찰 조사단이 수사에 착수한 지 2달여 만에 내린 결론이 민간에 판단을 맡기자는 것인 셈이다. 검찰이 조직 간부였던 안 전 검사장을 수사하는 것이 ‘셀프 수사’라는 우려를 감안한 조치겠지만, 달리 보면 스스로 결정했을 때 제기될 비난을 미리 피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일 수 있는 일이다.

조직 내부 문제를 조사해 드러내고 개혁하는데 외부 전문가의 객관적 의견을 듣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런데 외부 의견을 듣는 것과 일을 외부에 미루는 것은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적폐’라는 이유로 미움받는 행정부의 상한 자존심을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신뢰받지 못한다는 이유로 자신의 책무를 내려놓는 것까지 양해되는 것은 아니다. 정권 초기 높은 지지율은 계속 가지 않는다. 지지율이 떨어져도 정책이 굴러가게 하는 것은 결국 현장 공직자들의 능력과 판단에 달려 있다. 외부의 인정을 받지 못해 자존심은 잃었더라도, 경험으로 쌓아온 행정 실력을 스스로 믿는 자존감만은 지키고 가야 하는 이유다.

조민영 사회부 차장 my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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