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유성열] 하늘에서 내려온 공포의 대왕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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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는 세기말 기운으로 가득했던 시절이다. 종말론이 독버섯처럼 퍼졌고 큰 관심을 끌었다. 지구가 망한다는데, 내 삶이 멈춘다는데 그 어떤 다른 것이 더 중요할 수 있겠는가. 특히 ‘1999년 일곱 번째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다’는 문장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프랑스의 점성학자 노스트라다무스가 쓴 예언서에 나오는 문구로 종말의 시기와 방법을 언급한 것이라고 소개됐다. 1999년 7월 천체의 특이한 배치로 지구 중력장이 교란될 것이라는 근거 없는 관측이 나왔다. 핵전쟁 발발, 심지어 외계인의 지구 침공까지도 종말 시나리오로 거론됐다.

그의 다른 예언들을 나중에 확인해보니 실제 역사적 사건과 맞아떨어졌다는 식의 설명이 곁들여졌다. 여기에 2000년으로 넘어가면 전 세계의 컴퓨터가 연도를 인식하지 못하는 ‘밀레니엄 버그’로 큰 혼란이 벌어질 것이라는 당시로서는 그럴싸한 최첨단 종말론까지 등장하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힘을 보탰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른도 되어보지 못했는데 세상이 끝난다니 마냥 무섭고 억울하기만 했다.

시간이 흘러 1999년, 7월을 지나 8월이 되자 약간의 안도감이 들었다. 다행히 지구적 종말이 벌어지기는커녕 그럴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아직 1999년은 5개월이나 남아 있었다. 그해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이 되자 긴장감이 극도에 달했다.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시계의 초침이 계속 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커다란 해방감이 밀려왔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대부분 의미가 모호했다. 쉽게 말해 예언만 봐서는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일어난 일에 가져다 붙이기에 적격이었다. 그가 종말을 예견했다는 문제의 문장은 번역이 왜곡됐다는 주장까지 제기된다. 어느덧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흘러간 옛노래가 됐다. 그런데 최근 들어 잊고 지냈던 20세기 말의 두려움이 다시 떠오른다. 하루가 멀다 하고 극성을 부리는 미세먼지 때문이다. 미세먼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공포의 대왕’ 그 자체다. 무섭고 원망스럽지만 무력하다.

올해 3월 말 미세먼지가 대한민국을 대대적으로 공습했을 때다. 오전 출근길에 운전을 하는 내내 하늘이 잿빛이었고 시야는 뿌옜다. 라디오에서는 미세먼지의 위험성이 반복해서 나왔다. 그러나 그 누구도 뚜렷한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효과가 불확실한 미봉책뿐이었다. 숨을 참고 살 수는 없는데 숨을 쉴수록 건강이 나빠진다니, 나중에는 기분까지 한없이 우울해졌다. 일단 마스크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준비했던 방한용 면 마스크는 미세먼지를 막아주지 못한다고 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미세먼지 차단 효과를 인증했다는 의미의 ‘KF’가 적힌 마스크가 필요했다. 그런데 그것도 KF80과 KF94, KF99 등 먼지 차단 효과에 따라 종류가 여럿이었다. 각종 쇼핑몰에서 마스크 후기를 찾아보는 작업에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러다 문득 차라리 방독면을 마련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루 이틀 착용할 것이 아니라면 내구성이 더 뛰어나고 반복 사용이 가능한 방독면이 오히려 경제적일 수 있다. 그러나 방독면을 쓰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을 자신이 없었다. 나중에 미세먼지 상황이 더 심각해져 매일 마스크를 착용해야 할 때가 온다면 그때 방독면을 구비하기로 했다.

마스크든 방독면이든 뭐라도 써서 공기를 정화한 뒤 숨을 쉬어야 하는 세상이 됐다. 시내에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인파가 잔뜩 찡그린 얼굴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공포의 대왕이 진작 내려왔고, 종말이 진행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공상도 해본다. 늦었다는 후회가 밀려드는 지금 어쩌면 한참 늦었을 수도 있다.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하고 시행까지 해보지만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정책적으로 또 외교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더 적극 해봤으면 한다. 온전하게 숨 쉴 수 있도록 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정말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온 다음에는 늦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유성열 산업부 기자 nukuva@kmib.co.kr

그래픽=전진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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