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김찬희]  국가의 기억 기사의 사진
왕좌를 놓고 벌이는 싸움은 폭력이라는 본질에 기대기 마련이다. 협박, 회유, 속임수, 타협이라는 우회로를 찾기도 하지만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짧은 시간 안에 권력 교체가 이뤄지기 어려울 때 온건한 수단을 동원할 뿐이다.

인류 역사에서 지역의 패자(覇者) 혹은 강대국 간 권력 투쟁은 대부분 극단으로 치달았다. 미국의 국가안보·국방정책 분석가인 그레이엄 앨리슨은 지난해 펴낸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신흥세력과 지배세력 사이에 차츰 쌓이는 긴장·갈등이 가장 치닫기 쉬운 결말은 전쟁이라고 말한다. 이를 일러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도 했다. 엘리슨은 지난 500년 동안 신흥세력이 지배세력을 위협한 16번 가운데 12번이 전쟁으로 귀결됐다고 경고했다.

갈등은 국가 생존과 최단거리인 안보에서 주로 출발하지만, 먹고사는 문제인 경제의 껍질을 뒤집어쓰기도 한다. 1941∼45년 벌어진 태평양전쟁이 그렇다. 지배세력(미국)과 신흥세력(일본)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제해권을 두고 맞붙었다.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세력을 확장하던 일본에 맞서 미국은 ‘경제 제재’ 카드를 썼다. 처음에는 고철과 항공연료의 대일(對日) 수출을 막았고 이어 철, 구리 등 주요 자원을 금수 목록에 넣으며 강도를 높였다. 마지막은 석유 금수조치였다. 1941년 8월 석유 금수조치가 내려졌고, 넉 달 뒤인 그해 12월 일본 전투기가 하와이 진주만 상공에 나타났다.

현재 미국과 중국 사이도 뜨겁다. 두 나라는 남중국해 영유권, 대만 독립, 북한과 북핵 처리, 점점 늘어가는 경제적 다툼 등 다양한 단층선을 안고 있다. 어느 하나라도 터지면 거대한 연쇄반응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그나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0일 보아오포럼 연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화해 메시지를 전하면서 긴장도는 한결 낮아졌다. 그렇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정치적 목적이든 경제적 이익이든 이유만 생기면 미국은 ‘공정한 무역’이라는 포장지를 씌워 중국을 때릴 것이다. 중국도 마냥 당하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 분쟁·격돌은 갈수록 강도를 높일 수 있다. 안보를 미국에 의지하고, 무역을 중국에 기대고 있는 한국은 이때마다 ‘새우등 신세’가 될 수밖에 없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과정에서 벌어진 일들이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반전의 틈은 있다. 중국은 중국대로, 미국은 미국대로 협력자 혹은 지원자로서 한국을 필요로 한다. 중국이 절묘하게 줄을 타면서 동북아시아에서 목소리를 키우려면 한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 미국을 밀어내면 무장한 일본이 등장하게 된다. 달갑지 않은 장면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군사·외교에서 단단한 전열을 짜고 중국을 압박하려면 한국이 안성맞춤의 퍼즐 조각이다.

전략적 효용가치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면 다양하고 치밀한 전략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을 보더라도 아직 갈 길이 먼 듯하다. 협상 과정에서 ‘남북의 봄바람’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 ‘중재자이자 협력자 지위’라는 패를 제대로 썼는지 물음표다. 우리에게 확고한 통상정책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상대국과의 무역 분쟁을 미리 감지하고 사전에 상대국 정·재계에 ‘밑밥’을 까는 것도 통상정책이다.

지금이라도 치밀하게 셈을 해 전략을 만들어야 한다. 단계마다 버릴 것과 마지막까지 관철해야 하는 핵심 이익을 표시한 ‘국가이익 계산서’가 있어야 유연하면서 예민하게 대응할 수 있다. 유연하고 예민하게 행동하지 않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가 무엇인지는 과거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열강들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쳤던 구한말에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냈다. 미국과 일본이 격돌한 태평양전쟁에서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은 학도병으로, 위안부로, 강제노역자로 눈물과 목숨을 바쳐야 했다. 역사는 국가의 기억이다.

김찬희 경제부 차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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