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포커스-서승원] 北 비핵화 결단 후 경제지원을 기사의 사진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안팎에서 수많은 분석·전망이 제기된다. 백가쟁명(百家爭鳴) 상황이다. 이 중 미국 외교안보 분석 업체 스트랫포(STRATFOR)의 분석이 정곡을 잘 짚고 있는 듯하다. 남북한은 공히 강대국 사이에서의 지정학적, 역사적 현실과 씨름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 일부를 되찾으려 한다는 말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강대국들의 경쟁과 각축을 활용해 독립과 안전보장 공간을 넓혀나가는 방식. 이 가설이 맞는다면 북한 비핵화는 운명결정권 확보를 위한 중간 경유지가 된다.

강대국 중심의 지정학 게임에서도 약소국의 강력한 의지는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상당한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하며 관련국들을 설득할 수 있는 비전과 전망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군 확보도 불가결하다. 우군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것이 일본이다. 미·중·러에 비해 일본은 여전히 지정학 게임의 핵심 당사자는 아니다. 우리와 비슷하게 방법론에 차이는 있지만 보수든 진보든 운명결정권을 되찾고 싶어 한다.

김정은 정권이 표명한 ‘새로운 병진 노선’이 비핵화라는 전략적 결단을 단행하고 체제 보장이 담보된 상황에서 경제 발전에 매진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한·일 간 협력의 공간은 일거에 확장된다. “불행한 과거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지향한다는 생각에는 변화가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협력은 북한이 밝은 미래를 향해 가는 데 필요불가결하다.” 지난 11일 중의원에서 한 아베 신조 총리 발언이다.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마무리가 전제조건이긴 하나 북·일 정상회담, 그리고 수교 문제가 점차 가시권에 들어오고 있는 셈이다.

북·일 수교와 경제 협력에 대해선 2002년 9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합의한 ‘북·일 평양선언’에서 개략적인 틀이 마련됐다. ‘한·일 방식’, 다시 말하면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방식에 따른다는 것이다. 상호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신 일본이 경제 협력과 민간 투자를 제공하는 방식이다. 당시 일본은 한국 측에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엔 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를 공여했다. 현 시세로 대략 80억∼100억 달러 규모로 추산된다.

하지만 향후 북·일 간 경협은 ‘한·일 방식’보다는 ‘중·일 방식’이 유력하다. 일본 측은 전쟁 배상을 포기한 중국에 대해 1979년부터 2005년까지 전면적인 경제 협력을 실시했다. 핵심 수단은 총액 200억 달러에 달하는 정부개발원조(ODA)였다. 이는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 특히 5개년 경제개발 계획에 대응하는 형태로 추진되었다. 먼저 항만, 도로, 철도, 전기 등 사회간접자본(SOC)을 정비하고 다음으로 연안 경제특구에 해외 직접투자를 유치하며 후반부에는 환경 보전 및 민생 안건, 그리고 서부 대개발 지원 순으로 나아갔다. 일본의 ODA 공여는 일본을 비롯한 서방의 민간 금융기관이나 자본의 중국 진출을 선도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직후인 5월 도쿄에서 한·중·일 정상회담이 개최될 예정이다. 북·미 정상회담 전에 한·일 정상회담이 열릴 가능성도 있다. 북한 비핵화 문제에 대체적인 가닥이 잡힐 경우 대북 경제 지원 문제가 중심 의제로 부상할 것이다. 이들 자리에서 한·일 양국, 또는 한·일·중 3국이 비핵화 결단에 상응한 경제 지원 공약을 선언했으면 한다. 과거 일본이 중국의 개혁·개방 노선에 지원한 일을 주변 핵심 당사자 3국이 역할을 분담해 북한 개혁·개방 노선을 지원하자는 말이다. 대북 경제 지원은 북한 경제 발전뿐 아니라 북한 내부의 정치적 안정에 도움이 되고 대외 행동의 온건화를 도모하며 권위주의 체제의 중장기적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또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안전판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통일 비용을 절감할 수 있고 동북아의 지정학 게임을 평화·번영 게임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결정적인 촉매제가 될 수도 있다.

서승원 (고려대 교수·글로벌일본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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