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송용원]  잊히지 않는 상처 껴안기 기사의 사진
금년 부활절은 4월 첫날, 만우절이기도 했다. 부활절은 인터넷 검색 순위에서 만우절에 밀려 2위에 그쳤다. 꼭 만우절이 아니더라도 부활의 의미가 먼 이야기처럼 들려서 그랬는지 모른다. 신이 계시다면 왜 만물이 소생하는 4월을 이토록 처연하게 하셨을까. 남쪽 제주 땅에서, 경무대로 가던 경복궁 길에서, 진도 앞바다에서 신은 어째서 소중한 생명들이 꽃망울도 채 피워보지 못한 채 속절없이 지도록 모질고 험악한 바람을 그냥 두셨는가 말이다.

그 꽃들은 어디로 간 걸까.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남겨진 이들의 노래처럼 1000개의 바람이 되어 저 하늘 위를 자유롭게 날고 있을까. 곡식들을 비추는 가을의 따사로운 빛이 된 것일까. 아니면 저 깊은 어둠 속에 별이 된 걸까. 바람은 아니 비가 알고 있을까. 엄마와 아빠는 아이들이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해서 울고 또 운다.

그렇게 지난날의 기억은 우리를 만들어가고 마침내 우리 자신이 되어버린다. 기억은 정체성을 형성한다. 끔찍한 비극으로 가족을 잃은 희생자들과 동시대 이웃들 모두는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렇다면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지닌 채 남은 인생을 살아내야 하는 희생자의 이웃으로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노트르담대 교수 존 폴 레더라크는 학자와 실천가로서 25개국에서 30년 가까이 국제평화 구축을 위해 일했다. 그는 화해란 고통의 강에 집을 짓는 지난한 과정을 필요로 한다고 토로한다. 고통스러운 과거와 화해할 수 있을까. 그 기억을 포옹해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이것은 가해자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름 아닌 피해자 자신을 위해서다. 상처는 세월이 흐른다고 절로 낫는 것이 아니다. 상처의 흔적은 남을지라도 생생한 아픔에서 벗어나려면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상처와 직면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 왜곡과 억압을 걷어내는 ‘올바르게 기억하기’라는 대수술을 거쳐야 한다.

예일대의 조직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녹여낸 역작 ‘기억의 종말’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그가 가해자였든 피해자였든 기억하는 ‘내용’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기억하느냐이다. 인간의 존엄성 회복은 기억으로 시작되고 기억으로 완성된다. 몇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국가 공동체의 공정한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한 노력을 기울였던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북아일랜드에서는 피해자들이 그들의 고통에 갇힌 채로 기억보다 작은 존재에 머물지 않았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형언할 수 없던 고통까지 넘어서는, 기억보다 더 큰 존재가 되었다. 그들은 화해의 집을 고통의 강에 지었다. 하나님과 화해하고, 자신과 화해하고, 가해자와 화해했다. 가해자들은 감히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진실로 참회했다. 그러한 가해자를 피해자는 용서했다. 극단적인 인종분리차별정책 아파르트헤이트의 희생자인 한 흑인 여성이 자기 남편과 아들을 불에 태워 살해한 백인 경찰관을 용서한다며 경찰관을 향해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장면이 전국에 생방송되었다. 법정의 방청객 모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기 시작했다. 경찰관은 자기를 껴안으려 다가오는 그 여인 앞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십자가 처형으로 잃은 어머니 마리아의 찢어진 가슴에서 흐르는 눈물은 4월 이 땅의 눈물이기도 하다. 이 눈물을 평생 흘리며 살아야 하는 엄마들은 죽은 자식을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보고 싶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이 있다. 이들의 소망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주님께만 그 소망이 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요한계시록 21장 4∼5절)

송용원 은혜와선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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