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하나님의 평화 기사의 사진
한반도의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분단과 대결의 낡은 구조가 근본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보인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더욱 차분히 평화에 대해 묻고 그것을 성실히 준비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는 ‘국가 건설’보다 ‘국민 형성’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일 이유가 있다. 과거 독일에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을 때 그 도시는 여전히 분단의 도시였다. 통일 후 독일 정부는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었지만 옛 동독 주민이 체감하는 삶의 질은 오히려 뒷걸음질쳤다. 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서독보다 배 이상 높았다. 이런 이유로 동독 출신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피해의식으로 한 때 오스탈기(Ostalgie·동독 향수 바람) 현상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독일어로 오스탈기는 동쪽을 뜻하는 ‘오스트(Ost)’와 향수를 가리키는 ‘노스탈기(Nostalgie)’의 합성어다. 동독 시절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소박한 정을 나눌 수 있었던 옛 생활을 그리워하는 풍조를 가리킨다.

통일은 되었지만 장벽은 극복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시(동독인) 및 베시(서독인)를 갈라놓은 이질적인 정서와 극심한 빈부 차이로 통일된 독일은 분단의 고통을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당시 베를린 시민들은 ‘새로운 분단’ 아래서 신음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한반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치 않는다. 분단의 물리적 장벽과 제도를 허문다고 해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통일 ‘국가 건설’도 중요하지만 통일된 ‘국민 형성’이 더욱 중요하며 우리 모두는 이를 성실히 준비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평화통일교육이 절실하다. 평화통일교육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평화적 통일’에 관한 교육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와 통일’에 관한 교육이다. 먼저 평화적 통일에 관한 교육이란 통일의 방법이 절대적으로 평화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평화적 통일의 반대는 무력통일이고 흡수통일이다. 둘 다 평화의 길이 아니다. 평화로 가는 다른 길은 없다. 지름길도 없다.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은 평화다. 또 한 번의 한국전쟁은 민족 공멸의 핵전쟁이 될 것이다.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반전교육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평화통일교육은 ‘평화와 통일’에 관한 교육이다. 평화는 통일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통일보다 더 큰 것이다. 통일에 이르는 방법도 평화이지만, 통일의 목표도 평화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은 동아시아 전체의 항구적인 평화와 직결된다. 이 근본원리가 확고히 정착돼야 한다. 통일에 대한 교육은 평화에 대한 교육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뤄지는 교육이어야 한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는 “이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은 그리스도의 평화”(요 14:27)이고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빌 4:7)이다. 이 평화는 곧 구약성서가 말하는 ‘샬롬(shalom)’의 평화이다. 샬롬의 평화는 정의에 기초한 평화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진정한 평화는 갈등의 부재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다.” ‘평화, 평화’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평화가 오는 게 아니다. 정의를 강같이, 공의를 물같이 흐르게 할 때 찾아오는 게 평화다. 인간다운 노동, 충분한 음식, 기본적인 의료, 제대로 된 주거 환경, 그리고 인간의 잠재력을 충분히 개발할 수 있는 교육의 권리 등은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의 권리이고 모든 사람에게 이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그 정의 위에 세워진 평화가 바로 샬롬의 평화다.

평화를 향한 인간의 이해와 상상력이 많이 소진된 이때,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화를 기도하고 상상하며 또 온 마음으로 구축해나가야 할 것이다. “평화를 만드는 자는 복이 있다”(마 5:9)고 예수께서 선포하셨다. 한반도 위에, 동아시아 위에, 그리고 이 세계 모든 분쟁 지역 위에 이 온전하고 항구적인 하나님의 평화가 속히 임하시길 기도한다.

장윤재 이화여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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