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방현석] 남북 정상회담, 그리고 벗 기사의 사진
문 대통령에게 평양냉면을 ‘멀리서’ 준비해 왔다고 말한 뒤 순발력 있게 바로잡은 김정은
우리 민족이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서로를 진정한 벗으로 대하는 일이 전제돼야


문재인 대통령과의 첫 만남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여러 가지 중요하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그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말은 “멀리서 평양냉면을 준비해 왔다”고 한 자신의 말을 순발력 있게 바로잡으면서 옆에 앉은 친동생 김여정에게 한 “멀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였다.

‘멀리서 왔다’는 말은 벗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마음에 없는 사람에게 가는 길은 지척도 천 리 같고, 만나고 싶은 벗에게 가는 길은 천 리도 지척 같기 때문이다.

그러한 마음을 북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상식으로 만들어준 것이 소설 ‘벗’이다.

북한의 대표작가 백남룡의 ‘벗’은 1988년 발표돼 북한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현대소설이다. 예술단 여가수가 선반공인 남편을 상대로 제기한 이혼소송을 통해 북한의 사랑과 결혼, 이혼의 과정을 생생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상투적인 소설에 식상해 있던 북한 독자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백남룡은 분단과 함께 ‘친구’와 ‘동무’로 갈라져 반쪽이 되어버린 ‘벗’의 참뜻을 놀랍고도 완벽하게 소설로 되살려냈다. ‘벗’을 사귀고 대하는 마음가짐 대신 서로의 연고만을 강조하는 ‘친구’나 체제를 함께 건설하고 유지해가는 이데올로기적인 호칭이 된 ‘동무’가 빠뜨린 것을 백남룡은 날카롭게 주목한 것이다.

프랑스어로 번역된 ‘벗’이 남북한을 통틀어 파리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어’ 소설이 된 것도 ‘벗’에 대한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통찰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내가 ‘벗’을 읽은 것은 2005년 7월 남북작가대회 실무대표로 평양을 방문했을 때였다. 대회의 세부 일정과 발표자, 발언 내용을 북측과 미리 조율하는 것이 실무대표의 임무였는데 무엇 하나도 쉽게 이견을 좁힐 수 없었다.

결국 작가대회 본진이 직항편으로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대회 진행에 대해 북측과 아무것도 합의하지 못하였다. 착잡하고 우울한 마음으로 고려호텔에서 내가 한 일은 북에서 가장 유명한 백남룡의 ‘벗’과 ‘60년 후’, 남대현의 ‘청춘송가’를 읽는 일이었다. 나는 이 소설들을 통해 참 이해하기 어렵던 북한의 대표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읽었던 백남룡의 ‘벗’을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김 위원장이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만들어진 평창 고속철도를 언급하며 문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의 “교통사정이 불비하여 불편할까 걱정”이라고 한 대목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에 대해서는 눈감은 채 달라진 벗을 욕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다. 평범한 개인이 아닌 지도자에게는 더욱 그렇다. 김 위원장의 이러한 발언은 북한의 어려운 형편을 숨기지 않고 돌파해 나가겠다는 지도자로서의 결의인 동시에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4·27 남북 정상회담은 남과 북이 원수가 아닌 벗이 되는 길을 여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남북의 정상이 열어놓은 평화의 문을 통해 이제 남북이 모든 분야에서 벗이 되기 위한 한걸음을 내디딜 수 있을 것 같다.

13년 전, 이듬해 서울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던 남북 작가들의 약속이 올해에는 실현되어 따뜻하면서도 강인하던 ‘60년 후’의 작가 백남룡의 안부도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 남북 정상이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맞잡았으니 이제는 남북의 작가들도 문장 하나를 두고 그렇게 힘들게 시간을 끌며 얼굴을 붉히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남한과 북한 사람이 벗이 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마음에 든다고 해서 사귀자마자 지나치게 가까운 척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마음에 조금 거슬린다 해서 쉽게 절교를 하는 것도 벗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생활리듬’이 서로 맞지 않아 등을 돌린 ‘벗’의 남녀 주인공처럼 남한과 북한으로 갈라진 우리 민족이 다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서로를 진정한 ‘벗’으로 대하는 일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상대가 딱한 처지에 있을 때 외면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도리이고 상대가 어려울수록 더욱 가까이 다가가 손을 내미는 것이 벗이다. 한 사람은 왼손을 다른 한 사람은 오른손을 내밀어 깍지 끼고 서로 도우며 먼 길을 함께 가는 것이 바로 벗이다.

오른손과 오른손, 왼손과 왼손을 서로 맞잡고는 나란히 걷지 못한다. 벗이 되지 못한다고 해도 사람의 사이를 이간질해서 서로 미워하게 만드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방현석(중앙대 부총장·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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