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김일수] 신뢰가 없으면 죄다 헛일일 뿐 기사의 사진
개인의 언행과 달리 국가기관의 작용은 높은 신뢰를 생명력으로 삼아야
드루킹 수사하며 국민 신뢰 아랑곳 않고 정치권력 눈치 살피는 검·경, 더 큰 사고를 치게 될 개연성 높아


신뢰가 없으면 사회는 길 없는 정글과도 같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이 상황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만약 신뢰가 고갈된 사회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면 혹 우연히 마주치는 타인이 나의 기대와 달리 내게 어떤 해를 끼칠지 알 수 없는 우려가 우리를 에워쌀 것이다. 신뢰는 사회의 복잡성을 해소해 타인의 행위에 대한 기대를 가능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장래에 대한 예측가능성도 높인다. 반면에 불신사회는 각 사람의 생존에 갖가지 두려움을 준다. 그 결과 각 사람은 자기보존을 위한 방어시스템을 구축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좁은 생활영역에 칩거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타인과의 평화로운 공존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문명사회에서 국가의 기능은 무엇보다 이러한 불안정을 해소해 상대방을 믿고 선택하고 결정하며 사회생활을 의미 있게 영위해 나갈 수 있는 조건을 확립하는 데 있다. 도로교통을 예로 들자면 교통규칙에 따라 운전하는 사람은 다른 운전자도 자기처럼 교통규칙을 지키리라는 신뢰 속에서 운전하기 때문에 반대편 차선에서 오는 운전자가 갑자기 중앙선을 침범하고 넘어 들어와 자신을 엄습하지 않으리라는 기대와 신뢰 속에서 평안히 운전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신뢰가 무너진다면 정상적인 운전자도 일반적인 교통규칙 준수의 정도를 넘어 상대방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는 방어운전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뢰의 원칙은 오늘날 도로교통 분야뿐만 아니라 책임이 각자에게 분담된 상태에서 협업을 해야 하는 분업활동 분야에도 널리 적용되고 있다. 예컨대 대형 의료시설 내에서 협동수술, 과학적인 공동실험, 단체적인 공동탐사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사회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실제 다음과 같은 신뢰의 원칙을 가슴에 새겨두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활동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즉, ‘각자는 자신에게 타인이 원칙적으로 고의적인 악행을 저지르거나 부주의한 실책으로 인한 피해를 주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신뢰해도 좋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인간에게 원칙적인 행동의 자유가 있음을 전제하고, 그 행동의 자유를 통해 얻는 사회적인 유익과 그 자유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위험 사이를 저울질해 앞의 유익이 훨씬 크다는 낙관적인 전제에서 나온 결론이다.

남북 정상의 판문점 회동이 그동안 막힌 하수구를 뚫고, 평화와 안정에 대한 장래의 소망을 흘러내리게 한 건 뜻깊은 일이다. 임박한 북·미 정상회담과 그 후속으로 이어질 한반도 주변의 다자간 협상이 마찬가지로 순조롭게 이어져 이른바 ‘완전한 북한 핵 폐기’에까지 이르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 길이 순탄할지 여부는 바로 이해당사국 간 신뢰 구축에 달려있다는 점,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개막식의 화려한 축포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한 걸음씩 신의와 성실로써 진실에 다가가 완전한 핵 폐기의 확증에 이르는 것이다.

개인의 언행과 달리 국가기관의 작용은 더 높은 신뢰를 생명력으로 삼는다. 특히 법치와 정의실현에 봉사하는 권력기관일수록 이점을 생명같이 존중히 여겨야 한다. 최고 권력에 빌붙어 국민의 면전에서 거리낌 없이 거짓말을 하거나 불공정한 처신을 자행하는 것은 자살행위 같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짓이나 다름없다. 최근 불거진 소위 드루킹 사건을 다루는 수사기관들의 행태를 보면 마치 6·29 이전의 과거로 되돌아간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주기에 족하다. 정치권력의 눈치를 살피는 편향된 수사권력의 작용은 오늘날과 같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고 또한 있어서도 안 될 일이다. 국민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국민의 목소리를 무서워할 줄 모르는 권력은 실제 헌법을 파괴하는 폭력이나 진배없다. 국민의 신뢰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술책은 폭주하는 권력의 노리개가 돼 조만간 더 큰 사고를 치게 될 개연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그게 부메랑이 돼 권력의 기반 자체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가까운 과거에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이다.

신뢰는 지극히 건전하고 정상적인 사회인, 공정하게 사유하고 정도를 걸어가는 단체들이 획득할 수 있는 영예로운 가치다. 요즘 들어 도덕성에서 추락한 정치인들, 권력에 도취해 제자리를 벗어난 시민단체들까지 그 숨겨진 민낯이 드러나 양식 있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본분을 벗어나 권력의 한쪽 그늘에 기생하면서 단물 한 모금이라도 빨아먹으려 혈안이 된 채 일탈행동도 서슴없이 하는 자들이 있어 우리의 마음이 불편하다. 신뢰가 사라지면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풍우대작하는 날 말짱 헛일이 될 거라는 점, 명심하라.

김일수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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