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순복음교회 60주년] 홍콩·아르헨·브라질서 사상 최대 성회… 땅끝까지 뻗어나가다

<3> 선교 중심 교회로 도약(198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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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는 안팎의 시련 속에서도 국내외 선교에 매진하면서 비약적 성장을 거듭했다. 1996년에는 세계 최대 규모인 성도 70만명을 돌파했다.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주변을 가득 메운 성도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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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80년대 초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해외 선교를 통해 세계로 뻗어나갔다. 아시아에서 중남미까지, 미국에서 모스크바까지 복음 전파 사역을 이어갔다. 내부적으로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성도 70만명을 돌파하면서 ‘세계 최대 교회’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국내 유일의 기독교 종합일간지 국민일보를 창간하면서 문서 선교 사역도 본격화했다.

해외 구령사역, 풍성한 열매

1983년 8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전일본선교대회. ‘일본 1000만 구령의 초석’으로 꼽힌 이 행사는 당초 300명 안팎 정도 모일 것으로 예측했는데, 10배가 넘는 3000여명이 몰리면서 일본 전역을 놀라게 했다. 86년 조용기 목사는 홍콩 몽콕스타디움에서 홍콩 기독교 사상 최대 성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 남미 지역 성회에서도 사상 최대 집회 기록을 갈아치웠다.

당시 성회 현장에서 청중의 영혼을 뒤흔들며 복음을 받아들이게 만든 조 목사의 핵심 메시지는 이렇다. “예수께 나와 죄를 고백하고 여러분의 삶을 내어 놓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여러분 안에 임하셔서 여러분의 전 생애를 바꿔 놓을 것입니다.”

90년대 들어서는 동·서독 통일을 비롯해 공산권 국가들의 민주화가 이어졌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공산권에 선교사를 파송하는가 하면 성경 및 구호품을 보내면서 직접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공산주의 체제에 길들여져 있는 러시아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회는 좀처럼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조 목사는 92년 6월 러시아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에서 대성회를 개최했다. 연인원 4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만5000여명이 결신하는 ‘기적’이 일어났다. 앞서 조 목사는 같은 해 3월 도미니카 산토도밍고에서도 연인원 4만여명을 대상으로 교역자 세미나 및 부흥성회를 인도했다.

교리 논쟁 딛고 비약적 성장 거듭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80년대 들어서면서 밀려드는 성도들을 수용하는데 한계에 봉착했다. 82년 대성전 지하 1층에 이어 바울성전 등 4개 예배당을 증축했다. 85년 8월 2만5000명이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81년 20만명이었던 성도는 89년 50만명으로 늘었고, 96년 엔 70만명을 돌파했다. 단일 교회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다.

이 기간 교회에서는 기념비적 이벤트도 적지 않았다. 84년 1월 교회 명칭을 ‘순복음중앙교회’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바꿨다. 그해 11월에는 교회 대성전 앞에 대형 십자가탑을 건립했다. 기도하는 양손을 상징하는 십자가탑 높이는 33m로 건물 10층 높이에 달한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지속적인 성장은 교단 분열과 교리 논쟁, 이단 시비를 극복하면서 일군 값진 열매였다. 80년대 중·후반은 조 목사에 대한 국내 일부 교단의 교리 논쟁 등이 불거진 때였다. 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대한 이단 시비 및 교리 논쟁 등은 신학적 문제라기보다는 교단 간 발생하는 모종의 알력, 시기와 질투 등 지엽적인 것이었다.

결국 문제를 제기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총회는 94년 제79차 정기총회에서 별도 연구위원회를 통해 “조용기 목사의 신학은 오순절 교단 신학의 특수성에 근거한다”고 보고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문제 해결에 앞장선 핵심 중재자는 당시 국제신학연구원장이던 이영훈 목사였다.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국내외 선교뿐 아니라 한국교회 연합운동과 섬김 사역에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해왔다.

신문과 대학 통해 문서·교육 선교 박차

세계 최초의 기독교 종합일간지를 표방한 국민일보는 88년 12월 10일 창간됐다. 조 목사는 국민일보를 창간하면서 “국민일보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지시와 섭리에 의해 기독교회의 발전과 사회에 바른 소식을 전하는 국민의 대변지가 되기 위해 창간됐다”고 밝혔다.

‘사랑 진실 인간’을 사시로 정한 국민일보는 가로쓰기 16면, 종교면 1면의 종합 일간지로 첫선을 보였다. 90년 9월에는 종교면을 4면으로 늘려 총 24면을 발행했고, 92년 3월 14일 지령 1000호를 발행했다. 국민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소년소녀가장돕기 운동, 아프리카 난민돕기 운동, 사랑의 현혈운동, 범국민 친절운동 등을 선도했다.

이 시기(1983∼1992)는 기독교 인재양성의 틀을 다지는 때이기도 했다. 90년 순복음신학교가 정규대학으로 승격되고, 97년 한세대학교로 교명을 바꾸기까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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