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전정희] 다시, 역사의 기로 기사의 사진
1863년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역사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다. 남북전쟁에서 북부가 승리하자 해방 선언을 통해 노예 노동력을 공업 노동력으로 전환한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해 조선. 철종이 죽자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아들 이재황을 왕으로 옹립한다. 그가 고종 임금이다.

그 무렵 조선은 부정부패가 만연해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다. 1862년 초 진주 민란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익산 개령 제주 함흥 광주(廣州) 등에서도 또 다른 민란이 이어졌다. 다급한 정부가 삼정 문란을 시정할 목적으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했으나 세도정치의 폐단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한편 미국은 흑인과 하층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노예 해방과 함께 빠른 공업 자본주의로 제국주의의 기틀을 강화한다. 후발 미국과 독일 제국은 조선 해안을 기웃거리면서 우리의 힘을 엿봤다.

1866년 5월 미국 범선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 바닷가에 표착했다. 그해 1월은 대원군의 프랑스인 신부 처형 등 천주교 박해(병인박해)가 극에 달했던 때다. 관군에 붙잡힌 승무원 7명은 “우리는 프랑스 사람이 아니다. 미국 사람이다”라며 싹싹 빌었다. 철산부사 백낙연은 이런 그들에게 음식 약품 담배 등을 공급하고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보냈다. 우리나라가 미국과 접촉한 최초의 사건이다.

한데 불과 두 달 후 또 다른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통상과 교역을 강요하며 대동강변 평양 만경대까지 올라왔다. 프랑스 함대가 쳐들어올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국적불명의 이양선이 목사 토마스를 태우고 거침없이 들어온 것이다. 대포로 무장한 상선은 우리 중군(中軍)을 포로 삼아 교역을 요구했다.

결국 이 배는 평양시민과 평양감사 박규수 등이 이끄는 조선군의 화공으로 불타고 선원 전부가 몰살당했다. 천조국 미국을 상대로 이긴 것이다. 천조국은 ‘넘볼 수 없는 미국’을 일컫는 인터넷 용어다.

조선의 자신감은 그해 8∼10월 프랑스를 격퇴한 병인양요에서도 여실히 재현된다. 본국으로부터 ‘조선 정복’의 명을 받은 중국 주둔 프랑스 극동함대가 서울 양화진 앞까지 들어와 “선교사를 죽인 책임자를 처벌하고 교역하자”고 강압적으로 제안했다. 국제정세를 모르는 조선은 우왕좌왕, 묵묵부답. 프랑스 함대는 조선이 엄청난 화력을 준비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고 강화도 쪽으로 물러났다. 다급한 대원군은 명사수 500여명을 동원, 프랑스군을 기습해 물러나게 했다.

1871년 4월. 천조국 함대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점령했다. 미 대통령 그랜트는 “미국 국기를 욕되게 하지 않는 한 무력 사용을 하지 마라”며 조선과의 통상조약 조건도 제시했다. 군함 2척이 서울 길목인 강화 광성진을 점령하고 도성을 옥좼다. 뱃길이 막히자 서울의 쌀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그럼에도 조정은 병인양요쯤으로 생각하고 무사태평이었다. 한데 역사가 아이러니하게도 수비대장 이장렴과 구식 총기로 무장한 500여명이 결사항전, 가까스로 미 함대를 몰아냈다. 신미양요다. 대원군은 ‘화약은 매국이다’라며 척화비를 방방곡곡에 세웠다.

시민운동가이자 한국기독교 역사가인 오리 전택부(1915∼2008) 선생은 이를 두고 “중국과 일본은 외국 군대와 싸워서 진 것이 복이 되고 우리는 이긴 것이 도리어 화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1842년 중국이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굴복했고, 1853년 일본이 미국 페리 함대에 굴복함을 두고 한 얘기다. 개항의 때를 놓친 우리는 1876년 일본과의 굴욕의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강점기, 해방, 전쟁, 분단의 비극을 겪는다.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만난다. 우리는 또 한 번의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됐다. 역사는 힘의 논리이고, 평화는 테이블에서 이뤄진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없이 평화를 위해 기도할 때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종교국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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