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지금, 미술] ① 박찬경 ‘소년병’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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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냉전 시대 한국 사회를 영상작품의 주제로 다뤄 와
전쟁에 부서진 소년의 꿈 표현한 ‘소년병’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뤄
그의 미술언어가 어떤 작품으로 새로운 시대를 이야기할지 궁금


대중이 주로 미술에 기대하는 것은 밝은 색감으로 그려진 위로와 힐링의 언어인 것 같다. 그러나 기대를 배반하듯 미술가의 작품은 지금, 여기의 한국 사회에 대해 고민하고 반응한 결과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즘 미술 작가들은 우리 시대를 어떻게 표현할까. 이 시리즈는 미술 작품 속에 드러난, 혹은 감춰진 우리 사회의 얼굴을 훔쳐보고자 하는 시도이다.

민심의 촉수는 날카롭다. 남북 정상 간 ‘세기의 악수’를 흉내 내며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시민들. 정치적 빅 이벤트가 끝나고 주말을 보낸 뒤 신문들이 월요일자 1면에 낸 사진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시민들이 경기도 남양주시 남양주종합촬영소 내 판문점 세트장을 찾은 것인데, 순간 실제 현장 같은 기분이 든 건 역사적 회담의 생중계가 일순 젖혀 버린 ‘장막 걷기 효과’의 스펙터클함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난생 처음 들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육성은 ‘아, (평양과 서울이) 멀다 하면 안 되갔구나’라는 유머 코드였고, 그의 ‘냉면 먹방’ 영상은 어떤 무기보다 강력하게 남쪽 사람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그동안 반복 재생산됐던 ‘깍두기 머리 인민복’의 피도 눈물도 없는 적국 북한 지도자의 이미지는 그렇게 연기처럼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아, 이제 미술가 박찬경(53)은 무얼 먹고 살까. 최근의 급변하는 정치 지형도를 보며 짓궂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상당수 미술가가 분단이 할퀸 생채기를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해왔는데, 특히 박찬경이 그랬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장소, 판문점 군사분계선이 나오는 작품 ‘격세지감’만 해도 그렇다.

이 작품에 대해 논하자면 그의 형인 영화감독 박찬욱 얘기부터 해야 한다. ‘미루나무 도끼만행사건’의 현장, 남북 대치의 상징인 판문점을 남북 병사들의 우정의 무대로 전복시킨 건 박찬욱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2000년)이다. 남북 정상이 함께 손잡고 넘은 5㎝ 높이의 군사분계선은 18년 전 영화에서 남한 병사 이병헌, 북한군 중사 송강호가 브로맨스의 눈빛을 주고받던 그 장소다. 영화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간 정상회담이 이뤄지며 남북관계가 반짝 해빙무드에 있던 시기에 제작됐다.

2008년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후 남북관계는 냉각됐다. ‘공동경비구역 JSA’를 찍었던 남양주종합촬영소 판문점 세트장도 관람객 발길이 끊어졌다. 박찬경은 ‘유령의 집’ 같은 세트장에 주목했다. 2017년 6월 서울시립미술관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소장품’전에 형과 협업해 선보인 ‘격세지감’은 이 세트장에서 찍은 것이다. 송강호와 이병헌 이영애 등 등장인물의 마네킹을 세트장에 세워놓고 주요 장면을 복사하듯 찍었다. 송강호가 내뱉던 ‘야 야, 그림자 넘어온다’ 같은 익숙한 대사, 남북 병사들의 키득대는 웃음소리, 그리고 총성 등이 환청처럼 흘러나온다. 마네킹의 무표정 덕분에 ‘공동경비구역 JSA’가 표상했던 남북화해 시대에 대한 ‘낯설게 하기 효과’는 극대화된다.

속수무책 경색되는 한반도 정세에 대한 박찬경의 미술적 발언은 두 달 여 뒤인 그해 9월 말 국립현대미술관 ‘역사를 몸으로 쓰다’전에 내놓은 영상작품 ‘소년병’에서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문재인정부가 들어섰지만 북한은 6차 핵실험을 했고, 미국과 북한 지도자 사이에 ‘꼬마 로켓맨’ ‘늙다리 미치광이’ 같은 독설이 오갔던 무렵이다. 그 시점에 아무리 소년이라지만 북한군을 서정적으로 그린 영상 작품을, 그것도 국립기관에서 버젓이 선보이다니. 종북 논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세상이 미술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이 다행한 일이었다.

작품 속 흰 피부의 소년군은 천진하게 산과 내를 쏘다닌다. 몸에 맞지 않은 어른 군복의 헐렁함에 와락 애잔함이 밀려온다. 총은 저리 둔 채 나뭇잎 뒤 벌레를 보며 해찰하고, 숲 그늘에 앉아 하모니카를 부는 소년병. 드러누운 얼굴 위로 쏟아지는 햇살에 행복해하던 소년의 입에서 어느 순간 피가 흐르고…. 펄럭이는 군복, 날아가는 낡은 기타의 판타지 장면은 전쟁에 부서진 소년의 꿈이다.

박찬경이 택한 방식은 영상도, 사진도 아닌 그 중간이다. 35㎜ 필름으로 찍은 사진들이 이어 붙여져 슬라이드 환등기처럼 찰칵찰칵 소리를 내며 넘어간다. 그래서 한 컷 한 컷 바뀌는 시적 이미지에 더 집중하게 된다. 그렇게 작가는 연약한 소년군을 내세워 북한에 대해 세뇌된 강군의 적대적 이미지를 전복한다. 소년을 통해 이념과 무관한 북한을 상상하도록 유도하려는 작가의 미술행위는, 죽은 인민군과 소년 곰이가 달뜨는 밤 부스스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권정생의 동화 ‘곰이와 오푼돌이 아저씨’만큼 문학적이다.

한반도 정세는 확실한 해빙의 시대로 들어섰다. 1997년 첫 개인전 ‘블랙박스: 냉전 이미지의 기억’ 이래 냉전의 유령이 배회하는 포스트 냉전 시대의 한국 사회를 주제로 작업해 온 박찬경이다. 그의 미술 언어는 어떻게 바뀔까.

“현실이 너무 세니까 미술이 그 강도를 못 따라간다는 생각이 들어요. 재능 없는 작가들에게 이 땅은 지옥이 아닐까요.”

이렇게 말한 박찬경을 비롯해 한국 미술가들이 어떤 작품으로 새 시대를 이야기할지 궁금하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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