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정치에 관해 설교하기 전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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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교회가 사회에 무관심하면 안 되잖아요. 참여는 마땅하고 책임 있는 주체가 돼야 합니다.” 교회, 특히 목사가 정치적 사안을 설교할 때 요구되는 최소 윤리로서 기계적 중립을 취해야 한다는 나의 글을 읽고 가상의 독자가 던질 법한 질문이다. 교회는 사회에 대해 거리 두기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양비양시론이나 양다리 걸치기로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소속되기’가 필요하다.

거리 두기가 ‘나그네 됨’에 기초한 것이라면, 소속되기는 교회가 세상에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진리에 근거한다. 증인은 목격자이고 경험자이다. 본 것이 있고 한 것이 있기에 증인이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외쳤다.(행 4:12) 증인이 되지 않고 하는 정치 설교는 특정 정파의 앞잡이가 되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거리와 소속은 둘 다 필요하고 필수적이다. 거리를 두기만 하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친히 오신 것이다. 소속만 된다면, 십자가에 못 박힐 리 없다. 세상과 다르니까 못 박히신 것이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과 같지 않아야 한다는 이중적 요구는 교회의 본래적 긴장 관계이며, 그 위험한 줄타기의 성공 여부가 교회의 교회됨을 가늠하는 척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증언하는 정치 설교란 어떤 것일까. ‘국가에 대한 기독교의 증언’이란 책에서 신학자 존 요더는 증언과 로비를 구분하라고 강조한다. 신앙적 확신에 따른 행동이어야지, 자기 이익과 욕망의 성취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포장해선 안 된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위하거나, 보편적 정의와 인권이 아닌 몇몇 교회의 이해관계를 정치인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은 증언이 아니라 로비이다. 이것은 파멸적 소속되기이다.

농촌교회와 농촌 지역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하는 교회가 책임 있는 사회적 발언을 할 것이다. 생태계 파괴에 저항하고 환경과 자연을 지키는 일의 최전선에 서 있는 교회와 목사는 증인으로서 사회를 향해 과감하고도 대담한 설교를 할 수 있으리라. 자신의 실제 경험과 투쟁의 산물로서 다른 교회와 사회를 향한 외침에는 도덕적 정당성과 함께 영적 권위도 있는 법이다.

나는 SNS를 통해 사회 비판을 쏟아내면서도 설교에는 전혀 반영하지 못하거나 실천 없는 후배 목회자들에게 당부하곤 한다. 우리는 증인이지 검사가 아니라고. 세월호와 관련된 지난 정권에 대한 날선 비판 못지않게 유가족들을 위해 실천한 이야기를 하자고. 소녀상 건립을 위해 약간의 헌금을 보내거나 시위에 참여하라고. 특정 교회, 특정 목사를 비판해서 거룩해진다면 나도 비판하겠다. 그들을 비판해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증언으로서의 설교하기는 로비가 아니며, 실천의 반영이 설교여야 한다. 나의 고민과 질문은 이것이다. 과연 우리가 증인인가. 교회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 증인은 보지 못한 것은 말하지 않는다. 거짓 증언은 위증죄에 해당한다. 교회가 실천하지 않는 영역에서 설교를 남발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법정에서 위증죄가 아닐까.

존 요더가 ‘제사장 왕국’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만약 우리가 사회 안에서 근로자들의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교회는 노동자들을 공정하게 대하는 첫 번째 고용주가 되어야 한다. 만약 보다 넓은 사회 안에서 우리가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나 물질주의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교회는 그런 가능성이 가장 먼저 실현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한국복음주의신학회에서 ‘통일’을 주제로 학회를 연 적이 있었다. 나는 윤리분과에서 ‘교회가 복음이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요지는 교회가 먼저 통일이 돼야 남북한 통일에 관해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남과 북, 남과 여, 사장과 사원이 서로의 신분과 지위에 무관하게 존중받고 존중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 그것 이상으로 교회가 통일에 관해 할 수 있는 더 좋은 말이 있을까.

하여 통일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통일된 사회의 모습은 어떨까 라는 질문에 대한 최고의 대답은 이것이리라. “교회를 보면 되잖아. 저렇게 통일하고, 통일된 저 아름다운 모습을.” 그때 우리는 증인으로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눅 17:10)이라고 말하는 그날을 소망한다.

김기현 (로고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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