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교의 뿌리를 찾아서] <1> 네덜란드에서 싹 틔운 침례교회

존 스마이스, 개혁 열망 품고 영국 떠나와 첫 침례교회 세워

[침례교의 뿌리를 찾아서] <1> 네덜란드에서 싹 틔운 침례교회 기사의 사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담 광장에 있는 새 교회의 모습. 영국에서 건너와 네덜란드에서 첫 침례교회를 세운 존 스마이스의 무덤이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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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한국침례회 106차 총회장을 맡았던 성광교회 유관재 목사 등 목회자와 사모 19명이 침례교의 발자취를 찾아 유럽의 종교개혁 현장으로 떠났다. 이들은 지난달 16일부터 26일까지 네덜란드와 영국, 스위스 등을 오가며 오늘날 침례교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준 역사적인 현장을 둘러봤다. 이들과 함께한 순례 여행을 토대로 그동안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근원적 종교개혁’과 침례교의 시원(始原)을 4회에 걸쳐 소개한다.

한국교회는 지난해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독일의 마르틴 루터 등 종교개혁가를 새롭게 재조명하는 열기로 뜨거웠다. 개신교가 시작된 역사를 돌아보며 신앙의 정체성을 되새기려는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16∼17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개신교는 여러 분파로 나뉘었고, 이런 영향으로 한국교회에도 여러 교단과 교파가 존재하고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루터나 장 칼뱅처럼 정치인이나 국가 또는 시 정부의 후원을 받은 ‘관료후원적’ 종교개혁과 더불어 ‘근원적 종교개혁’이 존재했다. 당대 권력과 거리를 두고 신자들의 공동체를 통해 보다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했던 이들은 종종 급진적 종교개혁가로도 불린다. 한국의 침례교회는 이같은 근원적 종교개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들이 지난달 17일 첫 방문지인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한 것은 영국의 종교개혁가 존 스마이스(John Smyth)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당시 영국에는 국교였던 성공회의 중도주의 노선을 비판하며 뛰쳐나온 분리주의자들이 있었다. 영국 분리운동의 시초로 불리는 로버트 브라운 이후 등장한 스마이스는 특히 침례교 역사상 중요한 인물이다. 스마이스는 케임브리지대에서 공부한 뒤 성공회 신부가 됐지만 성공회 감독과 국교회의 권위를 부정하면서 핍박당했다. 결국 그는 토머스 헬위스(Thomas Helwys) 등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07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스마이스와 성도들은 암스테르담 운하 옆 렘브란트 광장 인근에 정착했다. 이들은 네덜란드의 아나뱁티스트(Anabaptist·재세례파) 중 온건한 성향의 메노나이트 교회와 교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당시 빵 공장을 운영하던 메노나이트 교인 얀 문터(Jan Munter)가 이들을 후원했다고 한다. 이들의 숙소나 예배 장소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이 사라졌고, ‘Bakkersstraat(Baker’s Street)’라는 거리 이름만 남아 있었다.

순례단은 대신 이들과 교류했던 네덜란드의 ‘숨겨진 메노나이트 교회’를 찾았다. 운하를 끼고 양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선 오래된 건물 사이에서 교회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주소지를 들고 찾던 중 건물 벽면에 ‘메노나이트 교회’라고 적힌 작은 표지판이 보였다. 1607년 세워진 ‘운하교회(Singelkerk)’로, 숨겨진 교회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길에서 얼핏 봐서는 교회임을 알아채기 어려웠다. 이 교회 복도엔 17세기 교회 봉사자 이름이 적혀 있는데 스마이스와 헬위스의 이름도 올라있다. 지금은 네덜란드 메노나이트 총회와 신학교가 이 건물을 쓰고 있다.

유 목사는 교회 앞에서 스마이스가 어떻게 침례교회의 시초로 불리게 됐는지 상세히 설명했다. “스마이스는 오직 믿는 사람만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신자의 자발적인 신앙고백과 침례가 교회의 기초가 돼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진정한 침례를 누가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스마이스는 자기 자신에게 침례를 줍니다. 이어 헬위스 등 성도들에게도 침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이 오늘날 침례교회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스마이스는 당시 아나뱁티스트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신앙고백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주는 유아세례는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유 목사는 “이들은 함께 성경을 읽으면서 유아세례에 문제가 있음을 공유했고, 세속 권력 등 그 어떤 것보다 성경의 권위를 우선시하며 따르는 종교개혁을 하려 했다”며 “국가와 교회의 분리, 유아세례 반대 같은 특징이 이렇게 형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순례단원들은 유 목사의 설명을 들은 뒤 잠시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박해를 피해 고국을 떠나 낯선 땅까지 흘러들어왔던 사람들. 모일 만한 번듯한 장소도 없었지만 네덜란드인의 도움을 받아 예배를 드리고, 신앙의 자유를 지켜나갔던 스마이스와 당시 성도들의 삶을 기념했다.

그동안 침례교회 기원에 대해선 다양한 학설이 존재했다. 1세기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Jesus)이 요단강(Jordan River)에서 세례 요한(John the Baptist)에게 세례를 받으면서 시작했다는 ‘제이제이제이 학설(JJJ Theory)’이 대표적이었다. 미국 남부의 침례교회들이 지지했으나 역사적 근거가 부족해 지금은 폐기됐다. 일각에선 스마이스가 메노나이트와 교류했던 것을 근거로 침례교의 뿌리를 아나뱁티스트로부터 찾는다.

하지만 일부 영향은 받았을지언정 침례교와 아나뱁티스트 간에는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김승진 침례교역사신학회장 등 대다수 역사가는 스마이스가 암스테르담에서 1609년 세운 교회를 최초의 현대 침례교회로 평가한다. 2009년 ‘침례교세계연맹(BWA)’은 침례교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며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총회를 열기도 했다.

당시 스마이스 등은 네덜란드의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가 주장했던 일반속죄설(그리스도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주장)을 따랐기 때문에 ‘일반침례교회(General Baptist Church)’로 불렸다. 하지만 스마이스는 이 교회를 세운 지 얼마 안 돼 침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바꾸고 메노나이트 교회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이에 반발한 헬위스 등 성도들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고, 암스테르담에 남아있던 스마이스는 1612년 눈을 감았다.

그는 담(Dam) 광장 옆 ‘새 교회(Nieuwekerk)’에 묻혔다. 이곳은 네덜란드 왕가의 결혼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교회다. 요즘에는 전시장으로 많이 활용된다. 이번에 순례단이 찾아갔을 때도 언론보도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스마이스는 영국을 떠나 네덜란드에서 침례교회의 첫 싹을 틔웠다.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네덜란드에선 더 이상 싹이 크지 못했다. 스마이스와 결별한 뒤 고향으로 돌아간 헬위스 등에 의해 침례교회의 싹은 다시 영국에서 자라나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글·사진 김나래 기자 nar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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